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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진섭 Aug 21. 2016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과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무언가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생각을 꼬아도 너무 많이 꼬았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인데, '고마운 건 그냥 고마운 겁니다.'라는 대사가 스치듯 머릿속을 지나갔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그 모든 관계들 속에서 때론 상처를 받기도, 상처를 주기도 하며 서로가 가진 다른 부분들을 조금씩 조율하고 타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란, 이해되지 않는 난제였다.


생각하기도, 감정을 쏟기도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질 무렵, 난 결심했다.


"그래, 그 말로만 듣던 히키코모리가 되어보자."



시작은 리드미컬하게



'페르소나'라는 말이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무대 위 배우들이 자신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연기를 했었다고 한다. 그 배우들이 쓰던 가면들을 페르소나라고 한다. 설령 자신의 감정이 연기를 하기 부적절할 지라도 그러한 것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가면까지 썼었다고 하니 그들은 프로였다. 


나에게도 여러 가면들이 존재했다. 누군가에게 따스하고, 친근하게 보이기 위한 가면, 어떤 일을 겪어도 난 괜찮다는 책임감의 가면, 모든 일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성숙함이란 가면. 그 수많은 가면들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가면들이 항상 내 감정과는 정반대의 상황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데도 불구하고 성숙함이란 가면을 꺼내 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면과 나 사이의 괴리감은 점점 커져만 갔고 내 감정은 조금씩 흐려지는 듯했다.


완벽한 고립 속에서 혼자가 되어갈 수는 없었지만, 출근을 해서 일을 할 때, 집 앞 마트를 갈 때를 제외하곤, 항상 집안 내 방 속에만 있었던 것 같다. 그 좋아하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철 지난 드라마들만 태블릿에 켜 놓은 채 침대 위에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우연히 거울을 통해 본 내 얼굴은 수염이 덥수룩한 선인 같은 아저씨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건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날, 거울을 통해 봤던 내 얼굴이 그러했다. 낯설다 못해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혀 속이 울렁거렸고 속에 있는 것을 다 게워낸 뒤에야 조금 진정이 됐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노트 한 권을 꺼내어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습관 중 하나인데, 생각이 복잡하거나,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생각나는 대로 노트에 적다 보면 항상은 아니지만 내 혼란스러움의 원인을 발견하곤 했었다.


그렇게 30분쯤 시간이 흐른 뒤에, 노트를 훑어보듯 읽으니, 그 당시의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기에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것,

나도 사람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는 것,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고 나서야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걸어나갈 수 있다는 것.


당연하다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나는 놓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마저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었고 되려 '나는 홀로 살아가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선포를 한 것이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나서야 나를 조금씩이지만 숨김없이 바라볼 수 있었고, 부족한 부분들도 인정할 수 있었다.


1%의 합리화와 포장 없이 자신을 바라본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우린 타인에겐 관대할지 몰라도 자신에겐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살아가곤 하는 것 같다. 타자와 어울림 속에 살아가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아닐까. 이기적인 의미로서의 나만 생각한다, 가 아니라 '내가 있어야 남도 생각할 수 있다'는 나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나는 사실 아직도 복잡한 수학 문제보다, 정치 경제적 이슈보다, 나 자신이 어렵다. 이해하기 힘들 때도 많고, 스스로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힐 때도 많다. 그렇지만 그럴 때조차 나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책하기보다는 최소한의 '존중'을 해줄 수 있다면 시간이야 조금 필요하겠지만 나 자신을 온전히, 숨김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믿고 존중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고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 자기 스스로에게 속삭여보는 건 어떨까.

지금까지 너를 이해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조금 늦었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너를 바라보도록 연습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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