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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계 Oct 31. 2020

생은 죽음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참회록> 이전의 작품과 이후의 작품으로 나뉜다. 1879년 발표된 <참회록>은 톨스토이가 어떤 정신적 위기를 겪고 부도덕했던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을 담은 글이다. 진정한 인생의 의미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서 숙고하면서, 그는 귀족으로서 자신이 누렸던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노동의 주체로서 가장 정직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농부처럼 살고자 했다. <참회록>을 쓰면서 자신이 깨달은 것들, 도덕적인 삶의 중요성과 윤리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 민담과 같이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한 형식의 짧은 단편들을 다수 집필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보 이반>과 같은 단편소설이 여기에 속하는데, <참회록> 이전의 소설은 작가로서 어떤 미학적 지향 속에서 창작한 예술 작품이라면, 톨스토이의 후기 작품들은 도덕적인 삶과 윤리의 가치 설파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 교보재 가깝다.


  여기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위치는 꽤나 특별한데, 예술 작품과 교훈적인 이야기의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참회록>을 탈고한 이후 처음 발표된 작품으로서, 사상가 톨스토이가 얻은 깨달음이 바탕이 되지만, 소설가 톨스토이가 교훈주의적인 색채를 덜어내고, 매끄럽게 소설의 형태로 다듬어 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착한 바보 이반은 형들을 용서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의 결말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죽음'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의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 및 그의 감정, 죽음으로 인한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을 그리며, 인간에게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그는 판사였다. 사회의 고위층으로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와 명예뿐이다. 그는 오직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서 일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상류 사회의 화려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적당하게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이었지, 직업에서 오는 보람과 소명의식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기조는 가정에서도 이어진다. 이반 일리치에게 아내는 파트너였다. 남들이 보기에 빠지지 않는, 적당한 조건을 갖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사랑과 신뢰 같은 같은 감정은 접어두고, 오직 보이는 것, 타인의 평가와 외부의 시선만을 신경 쓰며 살았다. 이반 일리치 부부는 17년간이나 함께 가정을 꾸려갔지만 타인보다 더 완벽한 타인이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면, 이반 일리치는 결코 자신의 삶이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직장에나 가정에서 그가 지켜야 할 가치와 관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신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홀로 병상을 지키는 동안 딸과 아내의 냉담한 태도와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의 형식적인 위로와 반응들이 서운해하며, 그제야 자신의 삶이, 자신이 맺어온 관계들이 허울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이반 일리치는 지금까지 그랬듯, 시시한 잡담과 입을 즐겁게 하는 맛있는 음식들, 카드놀이 등에서 얻는 기쁨에 만족하며,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고상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여기에서 톨스토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 너무 쉽게 잊고 산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의식하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는 죽음의 그늘에 갇혀, 두려움 속에서 인생을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을 통해 명확해지는 삶의 가치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삶의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들을 놓치는 과오를 범하지 말라고. 죽음은 우리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일러주는 리트머스 종이와 다르지 않다.


  러시아인들의 이름은 세 부분, 이름+아버지의 이름+성(姓)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반 일리치는 그의 이름과 부칭이다. 개인의 고유한 특성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성(姓)이 생략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의도적으로 주인공의 성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특정한 어느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전체, 즉 우리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앞둔 우리는 모두 이반 일리치다.  





1.

  소설의 초반, 이반 일리치의 부고가 전달되는 장면이다. 모두 이반 일리치를 좋아했다고 했는데, 그의 부고를 전해 들은 동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자신의 '승진'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동료로,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는 벌써 몇 주 전부터 병상에 누워 있었다. 불치병이라고들 했다. 그동안 이반 일리치의 자리는 공석으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가 사망할 경우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알렉세예프의 자리는 빈니코프나 시타벨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세베크의 집무실에 모여 있던 신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전해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과 지인들의 인사인동이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것이었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열린 책들, P. 10


2.

  게라심은 이반 일리치의 시중을 들던 하인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 가운데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죽음을 앞둔 이반 일리치를 진심으로 위로했던 사람도 게라심 뿐이었다.

  

«그래, 게라심. 좀 어떤가?»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물었다. «슬프지?»  «다 하나님의 뜻이지요. 우리도 결국은 모두 그곳에 갈 텐데요. 뭐.» 게라심은 농부다운 하얗고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그는 바쁘게 일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답게 활기차게 문을 열어젖히고 큰 소리로 마부를 불러 표트르 이바노비치를 마차에 태운 다음 아직 할 일이 많다는 듯이 휙 돌아서 현관 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열린 책들, 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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