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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계 Oct 27. 2020

나의 아픔을 방치할 자유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 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가 장편 소설만을 쓴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지하 생활자의 수기>와 같은 중단편의 소설도 집필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죄와 벌>에 담긴 이야기가 워낙 거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편 소설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분량이 이 짧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소설이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하 생활자'가 하는 말들이 처음엔 말도 안 되는 궤변과 사회 부적응자의 넋두리처럼 들렸다. 아니,  2 × 2=4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니! 이게 무슨 억지란 말인가?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지하 생활자의 주장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더 깊고 심오한 질문들과 닿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 생활자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지하 생활자는 확실히 이상한 인물이다. 스스로를 '병든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지하실에서 은둔자처럼 살아간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부모님, 친구, 애인 전부.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으며, 섬처럼 살아간다. 그에겐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도, 의지도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하고 지하실을 지키게 될 것이다.


 소통 능력은 일천하지만 지하 생활자의 자의식은 다른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 자의식 과잉에 가까운데, 그의 모든 감각기관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 그는 바깥의 것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간다. 그가 격렬히 반대하는 시대의 조류는 순수 이성과 자연법칙으로 대표되는 합리주의다. 18세기 말 유럽에서 태동한 합리주의는 이성과 논리를 이 세계의 근간으로 파악한다. 합리주의자들은 사물을 파악하고 삶의 양식을 결정하는 데 있어 오직 이성과 논리적 타당성만을 고려한다.  

  

  지하 생활자는 이러한 합리주의자들의 의견에 반기를 든다. 이성을 최종 심급으로 놓는 사고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내재된 가능성을 제한다. 인간의 모든 사유와 감정이 '이성'에 의해 미리 재단된다면, 인간은 이성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이성적인 생각, 합리적인 선택과 같은 범주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권리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 생활자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인간,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 생활자를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에겐 아파도 치료받지 않고 병을 방치할 수 있는 자유,   2 × 2=4와 같은 자연의 법칙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지하 생활자가 보여주는 극단성은 역설적으로 치열하게 인간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의지와 다르지 않다. 인간의 자유는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것, 누구도 토를 달지 않고 수긍할 만한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까지 아우른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범위의 것을 선택할 때 더 빛이 난다.


  이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라는 문제와 겹쳐진다. 합리주의 철학의 이끌었던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인간의 존재 근거를 '사유'에 둔다.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건 이성적인 사고와 사유 능력이다. 하지만, 인간이 어디 이성만으로 설명이 되는 존재였던가. 인간이 이성으로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인류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을 것이다.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은 불가능을 타파하는 수많은 도전들이었지, 시도조차 허락하지 않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그는 말한다. 인간성을 보장하는 것은 오직 '자유의지' 뿐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비합리적인 존재다.'


  이렇게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나란히 놓고 보고 있자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라는 생각이 든다.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숙고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하는 문제지. 다만 지하 생활자가 그저 자명하게 옳은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공연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님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그의 궤변 같은 헛소리는 사실 인간성에서 자유의지의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지하 생활자의 말을 단순히 이해되지 않음으로 치부하지 말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길. 그러면 조금은 지하 생활자를 이해하게 되실지도 모르겠다.





1.

  거칠지만 지하 생활자의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2 × 2=4로 대표되는 이성적 합의주의가 불변의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나에겐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당치도 않은 소리!> 그들이 당신에게 소리칠 것이다. <당신은 반대할 수 없을걸. 2 × 2=4일뿐이야! 자연은 당신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들이 당신 맘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 당신의 욕구에 개의치 않는다. 당신은 자연의 법칙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따라서 그것의 모든 결과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의 벽은 따라서 벽이다.……> 하느님 맙소사, 이런 법칙들과 2 × 2=4가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데, 정말이지 자연의 법칙들과 산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물론 나는 이마로 그 같은 벽을 들이받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실제로 그것을 뚫고 나갈 힘이 없다면. 그러나 나는 단지 내 앞에 돌 벽이 있으며 그리고 내게 힘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돌 벽 앞에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지하 생활자의 수기>, 열린 책들.  P.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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