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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계 Oct 25. 2020

문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

바를람 샬라모프, <콜리마 이야기>

  문학이 주는 효용 중에 하나는 작품을 통해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주어진 시공간 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이 한계를 문학 작품을 통해 뛰어넘는다. 문학 작품 속에서 우리는 과거 또는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날아갈 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절대로 경험해 볼 수 없는 사건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한 인간의 내면 저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기도 한다. 이러한 간접 체험들이 우리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한다. 타인과 타인의 삶을 공감하고 나아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여기서 시작된다.


  수용소 문학은 이러한 문학 작품의 효용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르다. 오늘날의 우리는 수용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인간의 기본권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제한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수용소에서 수형자는 주체가 아니라, 행위의 대상이 된다. 모든 것을 통제받는 극한의 상황은 사람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고, 수형자 간의 관계를 긴장시킨다. 수용소 문학은 수용소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그려내어 평범한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의 가장 본연의 모습을 그려낸다.


  국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러시아 수용소 문학 작품으로는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수용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가 있다. 오늘은 여기에 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를 덧붙여 보려고 한다. 우리들에게는 조금 덜 친숙한 작가지만, 그의 소설에는 다른 수용소 문학 작품과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다. 무엇이 다를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에는 총 33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 소설은 혹독하기도 악명 높았던 시베리아 동북부의 콜리마 수용소에서 작가가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콜리마라는 지역 자체가 도시와 문명에서 고립된 동토의 땅이다. 황량한 벌판과 지독한 추위가 콜리마의 전부다. 그럼 그곳에 위치한 수용소는? 지옥인가.



  샬라모프에게 수용소는 강제 노동, 추위와 배고픔, 눈과 비, 인간에 대한 증오와 폭력으로 점철된 공간이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삶, 유형수 개개인의  면모,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하면서 그 어떤 긍정의 요소도 남기지 않는다.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이곳에 수감된 흉악범들은 다른 수형자를 힘으로 제압하고, 그 위에 군림한다. 수용소 내부에서 크고 작은 폭행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어떤 유형수는 수용소에 갇힌 자신에겐 더 이상 삶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또 다른 이는 영하 50도의 추위 속에서 엄청난 강도도 이뤄지는 노동에 힘겨워한다. 콜리마는 그 어떤 미래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폐쇄된 공간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정치범으로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4년을 복역한 적이 있었다. 이후 유형지에서의 체험을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글로 남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형지에서 만난 죄수들에게서 어떤 인간적인 면모와 갱생의 희망 같은 것을 보았다. 솔제니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는 수용소라는 극한의 조건에서도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여전히 정직과 진실과 같은 가치를 존중하는 유형자들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샬라모프의 콜리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특히 샬라모프의 소설에서는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콜리마의 풍경이 3인칭 서술자의 객관적인 목소리로 전달된다. 주변 상황과 항상 거리를 유지하고, 관찰자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 어떤 과장도 없이, 담담하게 콜리마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전달하는데, 오히려 그 차분함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샬라모프의 단호함 혹은 잔인함이 완독을 방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극한으로 몰아넣는 경험과 감정을 제공하는 책을 만나기 쉽지 않으니, 여유와 에너지가 살짝 넘치는 어느 날, 잊지 말고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를.





1.  

소설집의 첫머리에 실린 <설원을 걸으며>에서는 작가로서 샬라모프의 포부 혹은 소명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선 안된다. 미약하나마 자신의 발자국을 남겨 길을 만드는 사람이 작가다. 나는 작가도 아닌데, 왜 자꾸 곱씹게 되는 거지...

첫 사람이 지나간 좁고 불확실한 발자국을 따라 대여섯이 일렬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간다. 그들은 앞사람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그 옆으로 걸어간다. 예정된 곳에 도착하면 되돌아와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설원을 짓밟으러 다시 걸어간다. 길을 개통되었다.  – 중략 –  발자국을 따라가는 사람은 누구나 제일 작고 제일 약한 사람이라도 남의 발자국이 아니라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의 일부를 밟아야 한다. 트랙터와 말을 타고 이 길을 지나다니는 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이다.

바를람 샬라모프, <콜리마 이야기>, 을유문화사, P. 7-8.


2.

  샬라모프가 바라보는 유형소와 수형자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 인간이 거짓말과 비열한 짓을 했다고 죽는건 아니였지.

수용소의 생활의 1분 1초가 독이 되지 않는 시간이 없다. 거기엔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보아서는 안 될 일이 너무 많다. 만약 보았다면 죽는 편이 낫다.
수인은 거기서 노동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수인은 거기서 아첨과 거짓말, 크고 작은 비열한 행위를 배우면서 이기주의가 된다. 자유의 몸으로 돌아갈 떄 수인은 수용소 시절 동안 자신이 성숙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 관심이 편협하고 부족하고 난폭해진 것을 안다.
도덕의 벽이 이디론가 옆으로 밀려났다.
비열한 짓을 하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거짓말하고도 살 수 있다.
약속은 할 수 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친구의 돈을 술값으로 써 버릴 수 있다.
구걸하며 살 수 있다! 걸식하며 살 수 있다!
사람은 비열한 짓을 하고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안다.

바를람 샬라모프, <콜리마 이야기>, 을유문화사, 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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