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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계 Oct 13. 2020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서 러시아를 떠올릴 수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될까? 이 자유분방하고 재기 넘치는 작가가 실은 러시아 태생이다. 독일로 망명한 뒤, 영어로 소설을 집필하면서 영미문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미국 작가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창작할 수 없는 처지를 유감스러워했다. 나보코프의 작품에 넘쳐나는 언어유희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말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러시아어로 집필했던 나보코프의 초기작들을 보면, 이렇게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작가가 또 있을까-싶다. 한없이 편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러시아어 대신 영어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면서, 그는 적지 않은 갈증을 느꼈으리라. 그러니까, 내 말은 러시아 문학도인 나도 나보코프에 대해 말할 지분이 있다는 것이다.


나보코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진




  <롤리타>는 나보코프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이다. 그것은 아마도 <롤리타>가 사춘기 전후의 어린 여자아이에게만 성적 욕구를 느끼는 중년의 남성 '험버트 험버트'가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성년의 소녀를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용어의 시작이 바로 이 소설이다. 험버트는 12살의 돌로레스를 ‘롤리타’라고 부른다. 험버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첫사랑 에너벨을 떠올리게 만드는 돌로레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데, 돌로레스와 함께 있기 위해 그녀의 엄마 샬롯과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샬롯이 죽음 이후다. 돌로레스를 향한 욕망을 유일하게 눈치챈 샬롯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험버트에겐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돌로레스를 데리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낮에는 돌로레스의 보호자인척 연기를 하고, 밤에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영화 <롤리타>의 한 장면


  소설에서 묘사되는 소아성애와 험버트의 비상식적인 태도와 윤리관 때문에 1955년 출간 당시 비판의 여론이 거셌다. 소재에 관심이 쏠리면서 실제로 외설적인 묘사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롤리타>를 둘러싼 논란을 의식한 나보코프는 이례적으로 ‘작가의 말’을 덧붙여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롤리타>의 도입부에서 사용한 이런저런 기법(예컨대 험버트의 일기장) 때문에 최초의 독자들은 더러 이 책을 음란 서적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관능적인 장면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가자 실망하고 따분해하다가 결국 독서를 중단하고 말았다.”(롤리타, 문학동네, 2013. P. 504)


  나보코프가 지적한 것처럼, 소재와 단편적인 이미지에 갇힌 독자가 아닌 사람들이 <롤리타>를 오독한다. <롤리타>의 소설 구조와 나아가 나보코프가 추구하는 미학 세계에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인 독자라면, 이 소설이 단순히 중년 남성과 어린아이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롤리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보코프가 언급한 ‘이런저런 기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험버트의 글 앞에 삽입된 존 레이 주니어 박사의 머리말이다. 그는 <롤리타>에서 험버트의 글을 얻게 된 경위, 그리고 그 원고를 폐기하지 않고 출판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험버트의 글을 ‘‘병자의 진술’이라고 가리키며, 정신병리학 분야의 고전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어지는 험버트의 글은 지극히 험버트의 입장에서, 험버트의 시선으로 쓰인 고백록이자 자신을 변호하는 진술서와 다르지 않다. 이 진술서는 과연 진실을 담고 있을까? 존 레이 박사의 표현에 따르면, 험버트는 ‘도덕적 문둥병자의 전형’으로서, 잔혹하고 비열한 인물인데, 우리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거지?

  

  험버트는 돌로레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미화하고 자신이 행동을 합리화한다. ‘님펫’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자신의 비뚤진 욕망의 시작을 어린 소녀에게 전가시키는 한편, 자신을 9세의 베아트리체를 사랑했던 단테, 14세의 버지니아를 아내로 맞은 에드거 앨런 포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미국을 횡단하는 긴 여정이 계속되는 동안, 롤리타의 목소리를 험버트의 말에 가려 들리지 않는다. 과연 험버트의 말처럼, 롤리타는 퀼티에게 유괴된 것일까? 험버트로부터 탈출한 것이 아니고?


  나보코프는 험버트의 글 앞에 존 루이 박사의 머리말을 추가함으로써, 위선적인 험버트의 세계와 그를 둘러싼 바깥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롤리타>의 미학적 가치는 여기에서 시작되는데, 하나의 작품에 안에 결이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는 바, 독자는 이 두 세계의 경계를 감지해야 한다. <롤리타>를 하나의 단일한 세계로 인지하게 되면, 그 안에 나보코프가 숨겨놓은 수많은 미학적 장치를 놓치게 된다. 언어유희와 같은 표현적인 차원에서부터 서술자, 인물의 진실성, 이중적 구조와 같은 구성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나보코프는 촘촘한 글쓰기를 통해 <롤리타>의 세계가 탄생했다. 독자들은 나보코프가 창조한 다층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가 숨겨놓은 여러 유희적, 미학적 장치를 탐색해야 한다. 나보코프는 이 과정이야 말로, 예술 작품이 수용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미학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롤리타>를 꺼내, 험버트의 시선이 아니라, 소설 곳곳에 ‘이런저런 기법’을 숨기며 즐거워하고 있을 나보코프의 흔적을 따라가 보시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독서 경험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1.


  작품 후반부 퀼티를 죽이고 나오던 험버트가 체포되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험버트가 한 행동이 교통법규를 어기는 모습으로 종합되어 묘사된다. 그가 한 짓은 중앙선을 넘는 것과 같은 행위임을 보여주는데, 험버트 본인은 횡격막이 녹아내리는듯한 상쾌함을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였고, 결국 그는 체포된다.


길은 이제 드넓은 들판으로 접어들었다. 그때 문득 -항변이나 상징처럼 특별한 의미 대문은 아니고 다만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으므로- 어차피 인류가 정한 규범을 모조리 무시해버린 마당에 교통 범규 따위에 연연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앙선을 넘어가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 확인해보니 과연 꽤나 괜찮은 기분이었다. 횡격막이 녹아내리는 듯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이렇게 일부러 역주행을 하는 일이야말로 기본적인 물리 법칙을 극복하는 일에 가장 가깝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더욱더 고조되었다. -중략- 빨간불을 무시하고 지나갈 때는 어린 시절 금지된 부르고뉴 포도주 한 모금을 마셨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귀찮은 일이 생겼다. 추격대와 호위대가 따라붙었다. 내 앞에 자동차 두 대가 나타나 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문학동네. P. 492-493.


2.

  이러한 나보코프 작품의 미학적 특징은 <사형장으로의 초대>, <절망>과 같은 작품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보코프가 독자에게 걸어오는 게임이 궁금하신 분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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