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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계 Oct 19. 2020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안톤 체홉,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체홉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 이야기만 하면 신난다.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처럼 신과 구원, 회개, 민족의  역사와 미래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없어서 체홉의 작품을 심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특별한 사건으로만 이뤄져 있지 않듯, 체홉은 비상한 재주로 안온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인간의 내면 저 깊숙한 곳에 또는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는 삶의 한 복판에 이르게 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읽기 시작할 때는 몰랐지, 그게 사랑이 될 줄이야.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휴양지 얄타에서 시작된다. 안나가 하얀색 스피츠와 함께 한가로운 발걸음으로 구로프의 시선 안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듯, 체홉은 무방비 상태의 독자를 따사로운 햇빛이 가득한 얄타로 인도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구로프와 안나의 첫 만남을 지켜보는 증인이 되는데, 구로프와 안나의 관계는 휴양지의 짧은 만남에 불과하다. 얄타의 태양과 공기는 결단코 도시의 것과 다르다. 그 낯선 곳이 주는 설렘과 달콤함이란! 지루하고 단조로운 도시의 일상과 대비되는 휴양지에서의 처음 만나는 이와의 눈빛 교환은 생각만으로 짜릿하다. 구로프에게 안나는 이전의 잠깐 만남을 가진 여자들과 별다를 바 없다. 안나에 대한 구로프의 감정은 안나에 대한 이성적 매력이 아닌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지의 여인과 나누는 로맨스에 대한 유혹이다. 구로프는 아주 능숙하게 안나에게 접근한다. 가벼운 대화가 시작되고, 맛있는 식사와 한가로운 산책, 얄타의 아름다운 경관은 둘의 마음의 거리를 좁혀준다.


  구로프는 안나는 서로의 거리를 좁혀 간다. 마음과 육체의 거리 모두. 둘의 관계는 분명 심화되었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부족하다. 구로프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울고 있는 안나를 담담히 쳐다본다. 체홉은 안나에 대한 구로프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수박'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자 여기에서 바로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수박'이 등장한다. 구로프가 더 이상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안나 옆에서 구로프는 테이블 위의 수박을 잘라먹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옆에서 울고 있는데, 한가롭게 수박이나 먹고 있을 남자가 있을까. 체홉은 구로프의 마음과 상황을 구구절절 서술하지 않는다. 안나의 옆에서 수박을 잘라먹는 구로프의 모습으로 그의 감정을 드러낸다. 구로프는 안나를 다시 만날 계획도, 마음도 없다. 구로프에겐 모스크바에서의 삶이 있고, 그곳으로 돌아가서 이전처럼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 세상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인간의 감정과 결부된 것은 더 그러하다. 구로프와 안나가 헤어지면서 둘의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격적인 관계는 둘의 헤어짐 이후에 시작된다. 얄타를 떠나 도시로 돌아온 구로프는 자연스레 원래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모스크바-도시에서의 생활은 빠르게 진행되며, 화려하고 풍요롭다. 구로프는 이전에 만났던 여인들처럼, 안나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 침식되어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간다. 구로프의 자신의 일상 속에서 안나의 환영을 보게 되고, 얄타에서 안나와 보낸 시간들, 그녀와 거닐던 얄타의 해변, 그녀와의 입맞춤 등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쉽사리 잊히지 않는 안나의 잔상으로 괴로워하던 구로프는 결국 그녀가 사는 도시 'S'시로 향한다.

  

  안나와 구로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극장 한 켠의 좁고 어두운 계단에서 재회를 한다. 안나만을 생각하고 향한 S시였지만, 구로프가 마주한 것은 S시의 낡은 호텔과 조잡한 지방 극장, 사람들의 시선이 이었다. 얄타에서의 달콤한 추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으슥한 계단에서 만나야 하는 지금이야 말로, 철저한 현실인 것이다. 얄타의 뜨거운 공기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 어떤 그리움으로 다시 만났다 하여도, 서로에겐 이미 가정이 있는 상태다. 구로프가 S시를 찾아간 그날을 기점으로, 구로프와 안나는 서로의 도시를 오가며 밀회를 즐긴다. 사랑인가- 어쨌든 무언가 더 깊어진 것은 확실하다.



  남편에게 병원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안나는 두세 달에 한번 구로프를 찾아 모스크바로 향한다. 구로프에게는 표면의 삶과 내면의 삶, 두 가지가 공존한다. 표면의 삶은 누구에게나 공개된 삶이고, 내면의 삶은 안나와의 만남을 포함하여 비밀스럽게 유지된다. 구로프와 안나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입맞춤을 나눈다. 그리고 안나는 자신들의 처지를 서글퍼하며 눈물을 흘린다. 안나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간단하다. 그들의 관계가 완전한 사랑이 된 것이다. 안나는 이 모든 것이 언제 끝나게 될지 말할 수 없다. 구로프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염없이 우는 안나를 다독이며, 구로프가 말한다. '그만 울어요 내 사랑'. 구로프 역시 자신이 안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진실된 감정이다. 위선으로 모든 것을 회피하기만 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구로프는 이 감정과 상황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하지. 얄타에서의 가벼운 만남이 이렇게나 복잡 해저 버렸다.


  구로프와 안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체홉은 구로프와 안나의 미래를 단정 짓지 않는다. 아니 체홉은 둘의 사랑의 '단정 지을 수 없음'을 그려낸다. '단정 지을 수 없음'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사랑의 진정한 속성이 아닐까? 계획되고 규정되는 순간 삶은 한 번도 생각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체홉은 이 짧은 단편에 하나의 틀로 규정되지 않은 삶의 모습과 그 사이에 숨겨진 우리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정말 좋아하지 않을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




1.

 구로프와 안나의 사랑이 지닌 '단정 지을 수 없음'이 그려진 마지막 장면이다. 안나에 대한 감정과 이 상황을 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갖기까지 쉽지 않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아니 더 복잡해졌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예전에 그는 슬플 때면, 머리에 떠오르는 온갖 논리로 자신을 위했다. 하지만 이제는 논리를 따지지 않고 깊이 공감한다. 진실하고 솔직하고 싶을 따름이다.......
 - 그만 울어요. 내 사랑. 그가 말했다. -그만 됐어요...... 이제 얘기 좀 합시다. 뭐든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해야 하고 속여야 하며 서로 다른 도시에 살며 자주 만날 수 없는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면 이 견딜 수 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가?
 -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는 머리를 감싸고 물었다. -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는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 될 거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 끝이 아직 멀고 멀어,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톤체홉,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열린 책들, P. 339.


2.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생각하면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이 돋보였던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2008)가 떠오른다. 마이클은 감옥에 수감된 한나를 위해 책의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낸다. 마이클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나는 한 자 한 자 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어 내려간다. 마이클이 한나에게 보낸 책 중 하나가 바로 체홉의 소설이다.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한나를 사랑했던 마이클이 그녀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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