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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계 Oct 18. 2020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으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공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은 두껍지만, 그만큼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한번 빠져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을 읽게 되는데, 그의 작품 가운데 특히 <죄와 벌>이 그렇다. 여타 범죄소설이 그러하듯, 죄를 지은 범인과 그를 쫒은 수사당국 간의 긴장과 범인의 최후에 대한 궁금증은 <죄와 벌>을 쉽게 놓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죄를 저지른 인간이라면 응당 벌을 받아야지-라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이에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두꺼울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가장 손쉽게 <죄와 벌>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가난한 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괴로워하던 중에, 자신의 몸을 팔아 가정을 지키는 소냐 만나 후, 자신의 죄을 반성하고 경찰에 자수를 한다. 이 짧은 줄거리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과 소냐를 만난 이후 자수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먼저, 도끼를 들고 전당포 찾아가기 전의 라스콜리니코프에게로 가보자.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우발적인 사건도, 돈을 훔치면서 발생한 부수적인 사건도 아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선택된 사람에겐 인류의 선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규칙과 도덕률을 넘어설 수 있는 권리 혹은 권한이 부여된다고 생각했다. 살인도 예외가 아닌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자 장사를 하는 전당포 노파는 공익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여러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할 뿐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인을 죽인 것이 아니다. 사회에 해를 끼치는 악을 단죄한 것이다. 이것이 왜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라스콜니코프의 논리는 일견 정당해 보인다. 법과 제도는 너무 거대하고 무거워서 실제 우리 삶의 복잡함과 변화를 반영하기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법의 영역이 다 아우르지 못하는 제도의 공백이 항상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범죄자들에게 힘으로 대응하는 다크 나이트에 열광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법의 한계를 넘나드는 존재에 대한 통쾌함!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자연권을 제한하는 데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준'을 설정하는 일이다. 누가 심판할 것인가? 무엇이 죄가 되는가? 죄는 어떻게 처벌되어야 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손에 도끼를 쥐어줌으로써 이 문제들을 우리 앞에 꺼내 놓는다. 라스콜리니코프의 행동은 죄가 되는가? 죄가 된다면, 무엇이 죄가 되는 거지? 자격 없는 그가 판단을 내린 게 잘못된 건가? 아니면 도끼로 사람을 내려치는 단죄의 방식이 잘못된 것인가? 이것이 <죄와 벌>을 읽는 동안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을 은밀히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내내 붙들고 있어야 하는 질문들이다.


  여기에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참회와 회개의 길로 이끈 존재가 '소냐'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몸을 팔아 가족을 지킨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소냐의 모습을 보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 진정한 감화는 처벌이 아니라, 그의 죄를 끌어안는 마음에서 온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냐'를 통해 마음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법에 따라 정해진 처벌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명문화된 법에는 담기지 않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이뤄지는 과정에 대한 것인데,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는 것 대신 광장에서 자신이 더럽힌 땅에 키스를 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노파를 죽였다고 고백하라고 권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죄를 짓고 그에 대해서 처벌을 받는 법에 따른 공식적인 과정 너머에서, 개인의 의식 차원에서 이뤄지는 자기반성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죄를 짓은 자에게 주어지는 진짜 벌은 감옥에 갇히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해 불안해하고, 정신을 속박당하는 것에 있음을 지적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변해도, 그 사회를 좀먹는 그늘진 구석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19세기에 쓰인 소설 <죄와 벌>이 놀랄 만큼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다. 소설에 담겨 있는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 개인과 공공의 선, 법과 윤리, 도덕과 양심, 반성과 회개의 복잡한 양상이 오늘날 우리가 사회가 당면한 문제와 긴밀하게 닿아있다는 인상을 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통해 제시하는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의 소설은 이 문제를 곱씹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1.

  노파를 살해하고 미처 전당포를 빠져나가지 못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동생 리자베타와 마주친다. 그는 노파를 내리쳤던 도끼로 리자베타의 머리를 내려친다. 사회의 악을 처단하리라-고 마음 먹었던 당초 그의 계획과 달리,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다. 패닉에 빠진 라스콜리니코프의 상태가 묘사되고, '예상치 못한 두 번째 살인'이 앞으로 그에게 닥칠 여러 시련의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임을 지적하는 서술자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초인'을 꿈꿨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실제로는 '범인'이었다.


타격은 정확히 두개골에 가해졌다. 도끼날은 금방 윗이마를 거쳐 정수리까지 그녀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쓰러졌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너무 당황하여 그녀의 보따리를 들었다가는 다시 던져버리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공포가 점점 더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특히 이 예기치 못했던 두 번째 살인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만일 이 순간 그가 더 정확하게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었더라면. 즉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곤란하고 절망적이며, 추악하고 어리석은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이때 그가 여기서 뛰쳐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할지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이 이보다 더한 악행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즉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수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열린 책들. P. 120-121.


* 2011년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 만화부문 진흥원장상 받은 네이버 웹툰 <살인자ㅇ난감>의 주제의식이 <죄와 벌>과 긴밀하게 닿아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신 분이라면 웹툰을, 웹툰을 재미나게 보신 분이라면 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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