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세계 Oct 15. 2020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그나마 문턱이 낮은 작품이다. 전쟁과 민족의 역사를 다룬 <부활>과 <전쟁과 평화>보다는, 결혼과 사랑, 여기에 이별과 복수를 이야기하는 <안나 카레니나>가 어쩐지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여기에 영화, 뮤지컬, 드라마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만들어지면서,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접근 방법이 훨씬 다양해졌다.


(좌) 소련의 안나와 (우) 미국의 안나


  문자 매체가 영상매체로 다시 태어나면서, 활자에 소리와 이미지가 더해져 풍부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소설만이 전달할 수 있는, 깊은 의미가 소실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안나를 단순히 남편과 아이까지 버리고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국에 자신의 목숨으로 죗값을 치른 불륜녀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천천히 음미하며 읽은 독자라면 알겠지만, 톨스토이는 사랑과 이별, 그리고 제도로서의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 관계를 결코 일면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아내 소피아의 일기에 따르면, 1870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구상했다. 그는 아내에게 '상류사회 사회 출신으로, 시집을 갔지만 자기 자신을 상실한 여성'이 떠올랐으며, '그의 과제는 이 여성을 가련하고 죄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안나의 시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나가 '결혼 이후 자기 자신을 상실한 여성'이며, 그리고 작가는 안나를 '가여운 존재'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는 안나를 단순히 외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녀는 담대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며 꾸밈이 없다. 그녀에게선 어떤 활기와 생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그 생기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문제는 이 아름다운 여성이 모든 에너지를 숨긴 채로, 화려하지만, 정형화된 상류사회에서, 사회적 체면과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관료 남편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리듬과는 전혀 다른 지루한 삶을 살아가던 여인이, 그 어떤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보지 못하고 주어진 삶의 사는 가운데, 자신의 억눌린 에너지를 알아차려주는 사람 브론스키를 만났다.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감정은 그의 외적인 조건에 사로잡혀 정염으로 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살아있게 해주는 삶에 대한 갈망과 닿아있다. 브론스키를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삶을 다른 이유로 포기하기 않았다.


  물론 결과적으로 안나의 행동은 불륜이었고, 결혼 서약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팔짱을 낀 채로 안나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부도덕함을 탓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안나만 참고 가만히 있었다면, 그녀의 가정은 유지가 되었을까?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비슷한 이유로 ‘행복한 가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세 커플, 안나와 카레닌, 레빈과 키치, 둘리와 스치바만 있을 뿐이다. 안나는 선택을 했고, 죽음으로 자신의 선택에 대한 값을 치렀다. 가혹했고, 불행했다. 그래서, 안나와는 다른 선택을 한 우리의 결혼은, 사랑은, 평온한 것일까?


    안나를 비난하기보다, 그녀에게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러면, 남편과 아이를 배신하고 떠나버린 무정한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 했던 안나가 보일 것이다.



1.

브론스키를 처음 만난 무도회에 안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간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안나를 본 키티는 그녀가 화려한 옷과 장신구 없이도 얼마나 아름다운 여성인지를 깨닫는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안나
키티는 요즘 날마다 안나를 만나고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렸으며, 그녀에게 꼭 라일락빛의 의상을 입혀보았으면 하고 공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검은 의상을 걸친 안나를 보자 그녀는 자기가 지금까지 안나의 참된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통감했다. 이제야 그녀는 전혀 새롭고 예상치 못한 존재로서 안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녀는 안나에게 라일락빛 의상을 필요 없다는 것, 그녀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녀가 언제나 치장을 초월하다는 데 있다는 것, 치장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데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레이스로 장식된 이 화려한 검은 의상도 그녀에게서는 조금도 돋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틀에 지나지 않았다. 돋보이는 것은 오직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우아하며 동시에 쾌활하고 생기 넘치는 그녀 자신뿐이었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권. 문학동네. P. 161.


2.

  안나의 생이 끝나는, 그녀의 마지막 장면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가 죽음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안나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다. 머뭇거림과 공포, 두려움과 회한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느끼고 있는 안나의 내면 묘사와 안나의 죽음을 '촛불'에 비유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저기다!' 그녀는 침목 위에 흩뿌려져 있는 석탄이 섞인 모래와 그 위로 드리워진 차량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저기로, 저 한가운데로. 그리고 나는 그이를 벌하고 모든 사람들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자.' (중략) 그러나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퀴와 바퀴 사이의 한가운데가 그녀 앞까지 온 바로 그 순간에 그녀는 빨간 손주머니를 내던지고 두 어깨 사이에 머리를 틀어박고 두 손을 짚고 차대 밑으로 넘어지면서, 그리고 곧 일어나려고 하는 듯한 가벼운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공포를 느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하고 무자비한 것이 그녀의 머리를 꽝 하고 떠받고 그 등을 할퀴어 질질 끌어갔다.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소서!' 그녀는 이미 저항하기엔 늦었음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한 농부가 뭐라고 웅얼거리면서 쇠붙이 위로 몸을 구부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불안과 기만과 비애와 사악으로 가득 찬 책을 그녀에게 읽게 해 주던 촛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확 타올라 지금까지 어둠에 싸여 있던 일체의 것을 그녀에게 비추어 보이고는 파지직, 소리를 내고 어두워지다가 이윽고 영원히 꺼져버렸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3권. 문학동네. PP. 427-428.


이전 03화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