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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계 Oct 21. 2020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니콜라이 고골, <외투>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 > 속에서 나왔다고.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러시아 문학사에서 니콜라이 고골은 꽤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와 그의 작품이 갖는 문학사적 의미를 차치하고, 개인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고골의 작품은 읽었으면 좋겠다.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소심하고, 찌질하다. 하지만 문장을 촘촘히 따라가다 보면 고골식 유머가 단순히 실소를 유발하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유머는 어쩐지 뒷맛이 쓰다. 고골 스스로도 ‘우리가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더 길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점점 더 슬퍼진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고골의 소설을 외투를 잃고 원혼이 된 하급관리의 이야기라고 요약해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그 웃픈 사정이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


이 사람이 고골!!!






  <외투>의 주인공은 아까기 아까끼예비치다. 외투를 잃고 원혼이 된 하급관리가 바로 이 사람이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고골의 창작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힐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테마, ‘관등’과 ‘욕망’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19세기 러시아는 ‘관등의 사회’였다. 근대적인 행정 체제 구축을 목표로 표르트 대제는 국가 공무원 등급을 14개로 나누어 업무 성과와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하는 관등 체계 만들었다. 이 ‘관등표’는 행정의 투명성을 확보하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고위공직을 맡을 수 있는 사람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은 귀족과 성직자로 한정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계급에 숫자가 단지 더해졌을 뿐이다. 우리의 주인공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9급 관리다. 태어났을 때부터 9급 관리!


  사람들은 관등과 그 위계 관계를 직장과 업무에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9급 관리는 8급 관리보다는 무시당해도 되지만, 10급 관리보다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아까끼가 맡은 업무, 문서를 다시 옮겨 쓰는 일은 그저 9급 관리의 하찮은 일 일뿐이다. 고골은 아까끼라는 인물과 그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함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관등에 갇힌 인간의 위선과 속물성이다. 이들은 관등표에 숫자만을 볼뿐, 사람은 보지 못한다. 고골의 풍자는 아까끼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잊은 듯 행동하는 관등에 갇힌 속물들을 향한다. 속물들에게 아까끼는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일 뿐인데, 가만 두면 행복하게 살아갈 아까끼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문제는 아까끼를 어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그려 냈지만,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를 통해 ‘욕망’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날 선 시선 속에서도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삶을 꾸려나가던 아까끼에게 ‘외투’라는 이전에는 가져본 적 없는 욕망의 대상 혹은 화신이 나타났다. 너무 많이 기워서 원래의 원단을 찾아볼 수 없는 아까끼의 낡은 외투, 새 외투를 주문하기까지 걸린 지지한 고민 과정, 외투 값을 마련하기 위해 저녁을 굶는 아까끼의 모습은 그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욕망이 건강한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던 그 욕망이 아까끼가 죽어서도 외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원혼이 된 가장 큰 이유니까.


  원혼으로 나타난 아까끼를 통해 고골은 욕망으로 파멸된 인간의 말로를 보여준다. 실컷 아까끼를 연민하게 만들어 놨으면서 아까끼를 통해 그걸 보여주다니. 처음엔 아까끼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직장 동료들이나 그의 소박한 삶을 보고 있자니 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투를 도둑 맞고 그가 죽었을 땐 그의 삶이 안됐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가 외투를 찾아 헤매는 원혼이 되어 나타났을 때의 그 당혹감이란...


  관등과 욕망은 한편으로는 닿아있다. 관등, 즉 등급을 나누어 위계가 생기는 곳에서 욕망이 시작된다. 욕망은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마음과 나보다 등급이 높은 사람에 대한 질투의 결합이다. 고골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인위와 위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속물성을 저격한다. 어쩐지, 19세기의 러시아와 우리의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1.

  아까끼가 돌아왔다. 아니 돌아와야만 했다. 내 외투 찾기 전에는 억울해서 눈을 감을 수가 없지. 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를 헤매며, 외투를 입은 사람들만 보면 제 것이라고 우기는 모습이 안쓰럽고, 애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 관한 이야기가 결코 여기서 모두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중략-  페테르부르크 전역에 갑자기 퍼진 소문에 의하면, 깔린낀 다리에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밤마다 관리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나 도둑맞은 외투를 찾아다니다가 외투를 입고 있는 사람만 보면 관등이고 계급이고 가리지 않고 자신이 잃어버린 그 외투라고 우겨 죄다 빼앗아간다는 것이었다. 고양이 털, 비버 털, 솜, 너구리, 여우, 곰 할 것 없이 몸에 두르도록 만들어진 것이면 털이든 가죽이든 죄다 벗겨가 버린다는 것이었다. 관청에서 근무하는 관리 하나는 자기 눈으로 직접 유령을 목격하였고, 그 자리에서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니콜라이 고골, <외투>, 민음사, P. 90-91.


2.

  러시아 문학에서는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그 공간이 갖는 특수성을 미학적으로 잘 드러낸 작품들을 '페테르부르크 텍스트'라 일컫는다.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청동 기마상>,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 안드레이 벨리 <페테르부르크>와 같은 작품들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고골의 소설이 이 작품들을 연결시키는 구심점의 역할을 한다. 고골이 그려낸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페테르부르크의 풍경은 그 어떤 소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를 탄생시킨 허위와 기만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대해서 이야기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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