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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계 Oct 23. 2020

1830년에 쓰인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알렉산드르 푸슈킨, <예브게니 오네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아마도  시가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이름은 몰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작되는  구절에 익숙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는 특히 한국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푸슈킨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도 아니고, 그의  하나 정도는 암송하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도 그가 이런 시를 썼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아마도, 삶이란 놈한테 맨날 속고 당하기만 한다고 생각했던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집어주어서가 아닐까? 이건 그냥  생각.




  러시아 문학도에게 푸슈킨은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다. 러시아 문학의 줄기는 푸슈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산문의 기초를 세우고, 가장 아름다운 러시아어로 시를 썼다. 그의 앞에는 항상 '국민'의 라는 칭호가 붙는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작가, 푸슈킨.


  러시아 문학에서 푸슈킨이 차지하는 위치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작품 오늘날 한국의 독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자그마치 1830년에 러시아에서 발표되었던 소설이다. 그 시대에는 귀족과 농노가 있었고, 자신이 받은 모욕을 되갚아주기 위해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 귀족과 사교계, 상류사회, 결투와 같은 단어들이 주는 낯선 인상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2020년을 사는 우리와는 전혀 닿아있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19세기의 귀족 젊은들이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관통하는 단어는 ‘성장’과 ‘성숙’이다. 이 테마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19세기 귀족들은 주인공이 되기에 아주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한 고민과 어려움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돈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처럼 괴롭히는 직장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생활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19세기 귀족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명확히 드러낸다.

  

  오네긴의 삶은 모방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생각도 감정도 예술작품이나 외부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현재 그의 심리도 유행을 따른 것이다.  그에게 진짜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다. 오네긴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타치아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그녀는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 주인공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의 사랑이 오네긴이라고 생각했다. 오네긴에 대한 열열한 구애는 그녀가 읽은 소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소설 중반 이후 오네긴과 타치아나는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 오네긴은 여전히 모방으로 삶을 채우며 그 자리에 멈춰 서지만, 타치아나는 텅 빈 서재와 다를 것이 없는 오네긴의 속성을 간파하고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군과 결혼하여 모스크바 사교계의 귀부인이 된다. 시골처녀의 티를 벗고 귀부인이 된 타치아나를 보고 이제는 오네긴이 그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로맨스 소설을 읽고 공상에 빠지는 소녀가 아니다.


  타치아나는 오네긴의 연서에 단호하게 답한다. 자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에서의 조용한 삶이 때론 그립지만,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에게 현재 주어진 역할을 다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인생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과 선택에 책임을 지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이것이 푸슈킨이 말하는 인간의 성숙이다. 미숙한 날이 있었을지언정, 자신의 부족함을 진솔하게 마주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시선을 갖출 것.

 

  미성숙한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1800년대의 러시아나, 2020년의 한국이든 크게 않을 것이다. 큰 깨달음을 얻진 못 할지언정,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는 조금 더 나아가길 꿈꾼다. 그런 의미에서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오네긴과 타치아나를 통해 '성숙'과 '성숙한 인간'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오네긴과 타치아나.

 



1.

작품 초반 푸슈킨이 '오네긴'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온갖 것에 대해 가볍게 언급하고, 중요한 논쟁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오네긴!! 그러면서 여자들에게는 추파를 던진다. 푸슈킨은 오네긴의 속성, 가벼움으로 처음 그를 소개한다.


우리 모두 무언가 어떻게든
조금씩은 배운 적이 있었으니.
다행히고,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
많은 이들이 (단호하고 엄격한 심판관들)
생각에 오네긴은 유식한 청년이나
지나치게 잘난 척했다.
대화 중엔 자연스레
온갖 것에 대하여 가볍게 언급하고,
전문가의 박식한 표정으로
중요한 논쟁에는 침묵을 고수하다,
예상치 못했던 경구의 불꽃으로
여인들의 미소를 자아내는 재주,
행운의 그 재주를 그는 갖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푸슈킨, <예브게니 오네긴> 을유문화사, P.14.

 

 

2.

 <예브게니 오네긴>에는 ‘시로 쓴 소설’이다. 운문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서사를 갖춘 텍스트다. 이런 형식적 특징이 우리에게 시의 말맛을 느끼면서 소설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계기를 마련해준다. 러시아어 원문에서 느낄 수 있는 각운이 사라진 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천천히 문장 하나 하나를 곱씹으며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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