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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Apr 15. 2020

수학의 배신

수학을 무기로 삼는 이들을 향한 일침

함께 읽는 책 No. 19

앤드류 해커(2019), 『수학의 배신』


앤드류 해커(2019), 『수학의 배신』



수학을 포기하면 안 되는가


우리나라에서 '수포자(수학포기자)'라는 키워드는 수학교육의 문제를 학생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초중등 수학교육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수학포기자가 초중등학교의 학생이 되는 순간 그들이 수학을 포기하게 한 원인제공자로서 초중등학교의 교사가 지목되게 함으로써 복잡하게 얽힌 구조적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수포자 문제에 동등한 책임이 있는 다른 주체들에게 면죄부를 주게되는 부작용을 발생시켰다고 생각한다.   


앤드류 해커의 <수학의 배신>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수학/수학교육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참조점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는 아주 솔직하게 파고든다. 앤드류 해커는 "수학적 추론 능력이 인생의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직접적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치밀하게 반박하면서, 인생이 수학 때문에 꼬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저명한 대학의 수학과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고, 늘 통계와 계량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학자이지만, 일상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수학 때문에 심각한 인생의 벽을 경험한 이들을 자주 만나며 수학 실력 자체가 곧 특권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기 길을 개척하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이 책을 썼다."


이 책을 우리나라 초중등수학교육에 대한 '모두까기'의 새로운 도구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수학/수학교육에 대한 비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만만한, 그렇기 때문에 '닥치고 비판'이 가능한 초중등학교에 집중된다. 사실 이 자체가 비판자들이 수학/수학교육이라는 것을 얼마나 도구적으로, 그리고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반증해준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에서 수학/수학교육에 대한 비판은 넘치지만 관심은 거의 없다. 특히, 대학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단순히 '내가 대학을 가는 데 수학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줄 알아?' 이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반면에 앤드류 해커는 존 듀이의 영향을 깊게 받은 미국의 초중등 수학교육에 대하여 호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오히려 저자는 미국 사회의 엘리트 주의와 이에 편승한 수학전문가집단을 향해 예리한 비판을 펼친다. 앤드류 해커가 보기에 그들은 일종의 수학신비주의를 전파하며 수학적 능력을 일종의 사회적 특권으로 격상시켜 버렸다. 바로 이 지점이 저자의 비판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나는 다음 문장을 읽으며 앤드류 해커가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묘사한 대목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미국이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과외 시장에 들어와보라. 학문의 기회가 사지선다에 달려 있는 한, 과외 시장은 교육 시장의 중추를 담당할 수밖에 없다. 2015년 통계를 보면 카플란과 프린스턴 리뷰와 같은 기업은 학원 강의와 개인 과외에서 70억 불을 벌어들이며, 이것 말고 프리랜서 과외 교사가 벌어들이는 돈 또한 최소한 30억 불에 이른다. 당연하게도, 대부분 자원은 수학 시험을 준비하는 데 투입된다. 사회 과목 사교육을 위한 수요를 찾기란 쉽지 않다. 

콜린 오펜자토는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개인 과외를 한다. 그녀는 과외 시간의 대부분을 수학 자체보다는 '수학 시험의 구조와 시험을 잘 치는 기술'을 설명하는 데 소비한다고 고백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거꾸로 풀기'라는 기술이 있다. 학생들은 실제로 문제를 풀기보다 편법을 찾기 시작한다. "편법을 가르치면 수학을 전혀 몰라도 SAT에서 400점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말이다. 물론 400점이 높은 점수는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시험 기술이 성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뉴욕 교외에 자리 잡은 펠햄의 지역 신문이 취재한 바로는, 가구 수의 절반 이상이 과외 교육에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미 검증된 엘리트 교육 체계 속에서 충분한 혜택을 받는 학생들마저 사교육에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다. 이는 곧 명망 있는 학교들조차 수학 마라톤을 준비하는 데 역부족이라는 현실을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출발선은 해마다 더 어린 나이로 당겨진다. 펠햄과 같은 교외 도시는 가구 소득의 중 간값이 114,444불이다(미국 평균치의 약 두 배다). 이러한 지역에서조차 개인 과외가 필요하다면, 다른 지역이 사교육비로 얼마나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할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수학이라는 장벽으로 사회 불평등이 두드러지고, 또 악화한다. 한쪽에는 소규모 학급과 실력 있는 선생이 완비된 풍족한 지역에서 부유한 가정의 자녀가 과외 교습까지 받는다. 카플란과 프린스턴 리뷰는 토요일 아침에 실시하는 10명 단위 그룹 과외비로 800불을 요구한다. 한편 맨해튼에서는 일대일 가정 방문 과외비가 시간당' 700불이다.

- <고등학교: 무엇을 위하여 수학을 공부하는가> 중에서


그러나 이러한 "수학이라는 장벽"은 학교 수학교육의 탓만은 아니다. 그는 "검증된 엘리트 교육 체계 속에서 충분한 혜택을 받는 학생들마저 사교육에 비용을 지출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이 수학교사가 재미없게 가르친다던가 학교가 학생을 만족시키지 못해서라고 마녀사냥을 하지는 않는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 사회가 욕망하고 있는 '특권'을 용인하고 그에 편승하려는 모든 이들이다. 물론 이와 같은 특권에 편승하려는 교사들이나 학교가 있다면 그들 역시 비판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리고 '수포자'를 양산시키는 주체로 이러한 학교와 교사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수학실력과 행복은 별개다


책의 목차를 소개한다. 각 장의 제목만 읽어봐도 어느 정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들이다. 


1장 거대한 착각 8
2장 무엇을 위해 수학을 공부하는가 24
3장 배관공에게 다항식이 필요한가 42
4장 생각만큼 수학은 중요하지 않다 66
5장 성별 격차는 어디에서 오는가 84
6장 수학적 추론이 우리의 지성을 높이는가 106
7장 수학 마피아 126
8장 누가 커먼 코어를 지지하는가 148
9장 같은 문제, 다른 관점 165
10장 ‘수학 머리’가 따로 있는가 182
11장 통계 해석에 필요한 상상력 202
12장 감각적 수리능력 키우기 221
글을 마치며 244
주 246


관심이 가는대로 넘겨가며 읽어보았다. 다소 거친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높다. 저자는 수학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수학의 위상과 역할에 맞게 대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수학의 중요성에 비해 학생들에게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대학의 학문(수학) 마피아들과 대학을 위한 변별력 때문이라는 주장인데, 이건 뭐..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나라와 다를 바가 없다. 저자의 생각은 책 표지의 문구를 통해서도 잘 전달된다.


당신의 좋은 것들을 수학에 빼앗기지 마라. 행복은 전혀 다른 것들로 결정된다!




같은 문제, 다른 관점


예를 들어 9장 <같은 문제, 다른 관점>에서는 (수학)교육에 있어서의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각각 훈육학파와 발견학파로 나누고 있는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훈육'과 '발견'을 양 극단으로 하는 스펙트럼의 어디쯤엔가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먼저 '훈육학파가 수학을 보는 시점'을 인용한다.


훈육/발견학과 논쟁은 인간 본성(유년기 본성)에 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반영하며, 사회를 성공적으로 지탱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 무엇인지를 다룬다. 훈육학파는 19세기의 교과서 저자, 윌리엄 맥거피 덕분에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맥거피는 학생들에게 정해진 교과과정을 엄격히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홀리크로스 대학의 카르스텐 슈테버는 이러한 훈육학파의 주장을 간략한 말로 요약한다. "반드시 수학 실력을 쌓아 야 하고, 힘들더라도 참아야 한다."" 그들 말로는 원치 않는 운명을 감당하는 것이 인생이며, 수학은 자제심을 훈련하는 좋은 수단이다.

또한 맥거피는 이러한 교육이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내면의 힘에 집중하고, 희열의 순간을 뒤로 미루고, 권위에 복종하는 미덕을 배운다는 것이다. 다른 학문과 달리, 수학은 유행이나 일회적인 의견에 휘둘리지 않는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푼 사이먼 싱은 이렇게 말한다. "수학은 모든 학문을 통틀어 가장 주관적이지 않은 학문이다." 토론은 사회과학과 어울릴 뿐, 기하학은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배워야 할 내용의 집합체다. 게다가 학생에게 혁신적인 수학적 발상을 떠올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헛다리를 짚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훈육 방식의 이면에는 미국의 청교도적 분위기가 깔려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며 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훈육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 상당수가 학생들이 재미있어 하는 교육을 삐딱한 시각으로 본다. 그들은 학생들 성향에 맞추려는 연예인 같은 교수를 멸시하고,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수업을 하는 초중고 교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훈육학파에서는 내심 “노력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라는 말이 육체 훈련만큼 정신 훈련에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 <훈육학파가 수학을 보는 시점> 중에서


어떤가? "미국의 청교도적 분위기"를 '동아시아의 유교적 분위기'로 바꾸면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수학은 현실 문제를 풀기 위해 고안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발견학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옮겨본다.


발견학파는 사범대학 교수들이 주축을 이룬다. 사범대학은 대부분의 초중고 수학 선생을 배출하는 곳이다. 이곳 교수들은 무명 인사가 대부분이며, 교내에서조차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그들의 제 자들이 미국 전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범대학 교수는 존 듀이의 교육론을 따르며, 의무교육을 담당하는 모든 제자에게 존 듀이의 철학을 전수한다. 사범대학 교수들은 모든 교육 과정에서 학생이 최대한 흥미를 느낄 교육 방법을 추구한다. 고등학생이 수학에서 낙제하는 이유를 아이들에게서 찾지 않고 수업 방식이 잘못된 탓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사법대학 교수가 수학을 비롯한 제반 교과목의 교육 방법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사범대학 교수들이 응원하는 발견학과는 학생 스스로 문제를 분석하고 풀이법을 찾도록 권장한다. 이 학파를 구성주의자(construcivist)라고도 부르는데, 학생에게 자신의 전략과 기술을 세우도록 장려하기 때문이다. 교실에서의 상호 소통을 강조하므로 상호주의자라고도 부른다. 여기에서 전제해야 할 것은 "수학 교실은 개별 학생의 집합이 아닌 학습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통 한 교실에는 25명이 들어가고, 한 반 학생을 5조로 나눈다. 각 조는 책상 주변에 둘러앉는다. 교사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각 조의 아이들 상대하고, 가끔 교단에서 아이 전체를 상대로 무언가를 설명한다. 문제를 푸는 학생들은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교사가 도와주는 것은 조원 모두 머리를 맞대고 풀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뿐이다.

- <수학은 현실 문제를 풀기 위해 고안된 수단> 중에서


이 역시 우리나라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사범대학 교수들, 특히 수학교육과 교수들 중에 과연 '존 듀이의 교육론'을 따르거나 스스로를 '구성주의자'라고 자처할만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혁신학교 운동을 중심으로 교사들 스스로 발견학파가 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사실 이런 교사들이 사범대학으로 진입해야 한다. 교직 경험이 없는 사람이 사범대학 교수가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수학적 사유로 수학을 비판하기


앤드류 해커는 아래 BBC의 칼럼 <수학을 포기해도 되는 나이가 있나요?>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BBC는 영국이니 수포자 문제는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닌 게 확실하다! 이와 별개로 글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지는 않다. BBC라고 꼭 양질의 글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https://www.bbc.com/korean/news-48672566



한 가지만 더. 이 책에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교양수학분야 저자들 이름도 상당수 등장한다. 케이스 데블린, 이언 스튜어트, 폴 록하트, 에드워드 프렌켈 등이 그들인데, 유독 프렌켈과 저자 사이의 견해 차이가 심하다. 책 속에서 저자의 입장에 대한 프렌켈의 반론과 그에 대한 재반론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결론적으로 말해 프렌켈이든 해커든 자신만의 관점이 있으며 (매우 당연히도) 그들의 관점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의 문제를 결코 누가 대신해서 해결해줄 수 없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고방식이야말로 문제를 더 어렵게 하는 태도이다. 수학적 태도가 21세기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직 '참'으로 증명된 것만 이야기하는 신중함에 있다. 수학적 사유를 지닌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치지 않는다. 그리고 틀린 부분이 있을 때 바로 수긍하고 고치려고 노력한다. 


'틀리지 않는 법'을 익힌다는 것은 틀린 부분을 찾아내는 것 못지 않게 그 부분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에 대해 노력하는 것이다.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해낸 과정을 생각해보라. 몇 백년에 걸쳐 불완전한 수학이론을 완성해내는 과정은 수학이라는 것이 결코 한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집단지성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공적 문제해결은 나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사적 문제해결과 다르다. 대한민국 수학/수학교육의 불행의 단초는 수학이 단순히 개인적 성공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수학이라는 틀에서 볼 때 수학은 수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민을 위한 수학, 공적 문제해결로서의 수학적 사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까닭이다.



 수학이라는 장벽은 학교 수학교육의 탓만은 아니다. 그는 "검증된 엘리트 교육 체계 속에서 충분한 혜택을 받는 학생들마저 사교육에 비용을 지출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이 수학교사가 재미없게 가르친다던가 학교가 학생을 만족시키지 못해서라고 마녀사냥을 하지는 않는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 사회가 욕망하고 있는 '특권'을 용인하고 그에 편승하려는 모든 이들이다. 물론 이와 같은 특권에 편승하려는 교사들이나 학교가 있다면 그들 역시 비판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리고 '수포자'를 양산시키는 주체로 이러한 학교와 교사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함께 읽는 책 No. 19

앤드류 해커(2019), 『수학의 배신』

앤드류 해커(2019), 『수학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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