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균형 감각을 잃는다는 것
글을 쓰다가 쓸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이 계속 생겼다. 여기 좋다고, 굉장하다고 강연도 하고 글도 쓰고 그러면서 살다가 서서히 망했는데. 망할 때는 내가 피해자고 슬프고 억울하고 그랬는데, 돌아보니 내 잘못도 너무 많은 것을 알았을 때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동네사람들”은 sbs나 한겨레나 서울시 사회적 경제 쪽으로도 많이 알려져서 지원 사업 선정도 잘 되고 여러모로 좋은 경험을 많이 했었다.
우리는 책도 내려고 했다가 결국 못 냈는데 쓰다 보면 알아졌던 것 같다. 이게.. 괜찮은가?
한국에 많은 주거 공동체나 공동체 마을이 있는데 우동사는 언론에 나가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홍보도 되지만 구성원 개인의 기쁨이기도 했고 부모님을 설득하기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엄마~ 이게 이런 거라니까!
인터넷 기사는 안 좋은 댓글도 많았다. 가장 많은 것은 미혼 남녀가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한 야한 댓글 같은 거. 부모가 걱정할 거라는 거. 막상 살아보면 그런 일은 없고.. 오히려 썸 타다 깨져서 분위기가 깨지거나 결국 한 명이 나가거나 하는 케이스 정도 생기는 것 정도였다. 실제로 성적 문제는 생긴 적이 없었다.
우동사는 잘 맞는 사람들은(포인트는 잘 맞는) 재밌게 살다가 “우리끼리 “ 너무 좋다 ”우리만 한 데가 없네 “ 를 넘어서면 타인의 얘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의 애즈원 공동체의 이론을 그냥 자기 하고 싶거나 자기 그룹을 폐쇄화하는데 갖다 쓰면서 이론이 그렇다니까~라는 식으로 하기 시작한 게 2015,2016년쯤으로 주거공동체로 산지 5년을 넘기며 열려 있는 공간에 대한 피로감이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매번 손님 오는 거 귀찮고 내 공간 보여주는 거 귀찮도 인터뷰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끼리 더 깊어지고 싶은데… 그만 오라 그래! 하는 마음.
내가 사랑했던 애착이 있던 우리동네사람들이 서서히 망해가기 시작하는 순간을 떠올리고 감정과 분리하며 쓰는 게 어렵다. 그러나 해나가고 싶은 작업이다. 이 순간을 알기에 지금 다른 공동체에서 살면서 뭐가 어떻게 다른지 무엇이 필요한지 절절하게 알게 되는 것 같고 나를 피해자로 두는 게 아니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떤 역할을 해왔나.
공동체가 현실감각을 잃는 것은 내부적으로 너무 좋을 때다. 타인들이 하는 얘기가 지적으로 들리고 너희가 몰라서 그래하는 마음이 올라는 순간(이건 나쁜 연애를 하는 사람 같다.ㅎㅎ)을 정말 경계해야 한다.
공동체가 궁금해서 온 사람들에게 오히려 서운함, 경계, 스트레스를 줬던 것들은 뭐가 있었는지 앞으로 써보려고 한다. 그리고 내부에서는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을 나눠 배제하기도 했다.
우리동네사람들이 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친밀감, 그리고 구성원들 간의 위계가 생긴 것 그리고 선망을 묵인하며 서열 그룹핑이 생기면서부터였다. 누군가 그 부분을 지적하면 에이 그런 거 없어, 널 배제하려는 게 아니야, 하고 싶은 사람이랑 하려고 하는 거야 서운해하지 마 라는 말로 본질을 흐렸다. 서운하다는 사람에게 서운함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는 선문답을 날렸다. (정토회를 다닌 사람이 많아 이런 질문이 나오면 일단 밀을 멈추고 내가 뭘 이해 못 한 거지…라고 수그러들게 된다)
많은 공동체가 정보의 위계와 소외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는데 우리동네사람들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외면하던 것들이 나중에 다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 애즈원 커뮤니티의 이론은 “마음 나는 만큼” 하는 거라고 갖다 쓰면서 자신의 마음, 감정을 너무 소중하게 끌어안으면서 심각해지게 된다.
자연적으로 올라오는 마음은 내 가족, 내 애인, 나랑 친한 사람, “우리”를 지키고 싶기 때문에 결국 울타리릉 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당연하고 존중되어야 할 감정으로 여겨진다.
이 부분을 이성으로 깨나 갈 수 있는가 아닌가 가 공동체다 지속가능한지, 한 십 년 하다 갈리는지를 결정하는 엄청난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공동체 리더가 얼마나 알고 이를 어렵지만 깨나 갈 수 있나, 어영부영하는가로 판가름이 난다. 리더도 가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내 가족주의로 환원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