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통첩과 관련해 아무런 언급도 안 하던 한 달여 동안에도, 법인장님의 챌린지는 끝이 없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한 상황에서도 제품군별로 목표비율이랑 다르다며 맞춰야 한다고 챌린지, 목표랑 상관없이 2배를 더하라고 챌린지였죠. 거기에연말 연초인 만큼 유럽본부와 본사에 내야 하는 장표들도 많았고 내부적으로는 기초를 다지겠다며 주차별 계획같은 각종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최후통첩 이후, 그래도 저는야근은 할지언정 이제 더 이상 주말에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펑크를 내라 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싶기도 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어차피 월급은 안 올려줄 거 같아 받은 만큼 일해야지 싶었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일주일에 한 번은 재택을 하려고 했습니다. 원래 일주일에 한 번은 재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상관인 법인장님이 본인은 직원들이 회사출근하는 걸 선호한다고 하시고, 어차피 저도야근하고 주말에 근무하는 마당에 무슨 재택이냐 싶어, 3개월 넘게나라에서 하는 정기검진날 빼고 안 했거든요. 최후통첩 이후 좀더 힘을 빼고 일했지만, 업무 스트레스는 점점 커져갔습니다 일할 사람은 없는데 앞으로 해야 할 큰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 와중에 법인장님은재택 하려고 했던 금요일마다 불러서 보고를 시키네요. 그날도 제품팀 주재원들과 함께 앞으로 주차별로 무슨 제품을 어떤 행사로 얼마에 몇 개나 팔건지 6개월치를 다 세팅해서 보고하라고 시켰던 날이었죠. 원래는 두 명의 주재원과 함께 보고해야 했는데 한 명은 휴가 가서 제가 대신 보고하고 다른 한분만 같이 들어갔었네요. 같이 보고 갔던 다른 한 분은 스웨덴 오신 지 이제 두세 달밖에 안 되셔서 엄청 헤매고 계셨는데 그래도 제가 몇 개월 더 있었다고 도와가며 보고 준비를 했었죠.
어찌어찌 보고를 다 끝내고 나가는데 법인장님이 오늘 오후에 시간이 있냐고 하시네요. "너무 늦게는 좀 그렇지"라시길래 "네"라고 대답을 했더니 4시쯤 보자시네요. 본인이 부를 테니기다리지 말랍니다.
아, 이제 수습기간 끝나니까 계약서 다시 쓰려고 그러나 보다. 지난번 말한 데서 뭐 좀 업데이트된 게 있으려나?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저보다 한 달 먼저 들어온 다른 팀 팀장님이 퇴사하는 날이었습니다. 다른 한국 회사의 법인에서 일하시다 이 회사로 오셨던 분이셨는데 마음에 안 들어하던 차에 훨씬 더 좋은 근무환경과 연봉을 주는 다른 회사로 이직을 성공하셔서 퇴사하는 날이셨습니다. 그동안 회사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사이라 앞으로의 만남과 저의 이직을 기원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인장님이 저를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법인장실에는 법인장님만이 아니라 두 달 전에 뽑힌 인사팀담당자도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법인장님이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얼마나 되었냐며, 이제 곧 만 5개월이라고 하니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정말 열심히 해줬고 눈에 띄는 성장을 했다고.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어가긴 시작한 11월부터는 연속으로 크게 성장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그 달인 1월은 전년 대비 2.5배 이상 성장해서 다른 유럽법인들 중에서 단연 최고 성장률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저한테 지난 5개월이 어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전 솔직하게 말했죠. 쉽지 않았지만 노력했고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힘들긴 했다. 그랬더니 뭐가 힘들었냐고 물어보네요. 지난번에도 했던 이야기였지만 인사담당자 앞에서는 처음이니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제가 말했던 최후통첩 얘기를 꺼내시네요. 3가지 조건을 얘기한 게 있지 않냐며 첫 번째는 어쩌고 두 번째는 어쩌고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십니다.
그러더니
수습기간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네요. 그러면서 회사는 소비자에게 인생이 즐겁다고 메시지를 주는데, 막상 소비자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제 삶이 너무 안 좋아 보였다네요. 제가 말했던 여러 번 울었다는 얘기를 덧붙이면서요. 그리고는 인사팀장을 시켜서 계약종료서를 꺼내게 하더니 본인이 사인하고 저 보고도 사인하랍니다. 계약 종료일은 2월 28일. 입사한 지 딱 6개월 되는 날이었습니다.
와.. 성과로는 공격할 수 없으니까 이런 얘기를 하며 자르나요. 제 회사 생활의 개선해줘야 할 저의 보스가 개선은 안 해주고 나 몰라라 하면서 일만 시키더니 제 인생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그만 일하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요. 그리고 천년만년 일할 사람처럼 일 시키다가 쓸 수 있을 때까지 쓰더니, 자를 수 있는 마지막 날 금요일 4시에 불러서 얘기하나 싶어 어이가 없었습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 저한테 일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해라 그게 사람이면 사람을 바꾸고 그게 시스템을 바꾸겠다더니 아무것도 바꿔주지 않고 저를 바꿨네요. 저한테는 '다는 아니라도 이렇게 저렇게 해 보겠다'라고 몇 번을 얘기하더니 뒤로는 사람 뽑았다니 참...
그때 이야기 듣고 이래저래 생각을 해봤는데 새로운 사람을 뽑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다.
이렇게만 얘기했어도, 어차피 "이렇게는 더 이상 못 하겠다"고 먼저 말 꺼낸 건 저니까 "네, 결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인사팀 끼고 바로 종료 계약서라니. 이제까지 고생한 직원에 대한 일말의 예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입사 전부터 한국에 한번 갔다 와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법인장이 입사를 빨리할 수 있냐고 재촉하며 다들 몇 주씩 휴가 많이 가더라 입사해 가라길래 그럼 수습 끝날 때쯤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입사를 했었죠. 그리고 12월에 이듬해 2월 9일부터 3주가량 한국에 다녀올 거라고 미리 말을 해둔 상태였습니다. 오랫동안 자리 비우는 게 좀 그래서 1주 정도는 재택을 할까 한다고 하니 1주일까지는 아니라도 1주일에 한번 정도씩 재택 해주면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하신 상태였죠.
그런데, 마지막 근무일이 2월 28일이면 제가 아직 한국에서 돌아오기도 전이네요. 그래서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2월 9일에 한국을 가니, 그럼 2월 8일까지만 일하는 걸로 하고 나머지 다 휴가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만두는 거니 재택 할 필요도 없이 그날을 마지막 근무일로 하겠다고요.
제가 받을 수 있는 휴가 일수는 일 년에 30일. 그런데 주말까지 일하는 판에 휴가를 쓸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5개월 동안 단 하루의 휴가도 쓰지 않은 채 보냈었죠. 심지어 남들 다 쉬는 크리스마스 이후에도 근무하고 아이들의 가을 방학 때는 남편 혼자 애들 데리고 여행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휴가일수는 충분했습니다.
이래저래 계산을 해보니 업무 일수는 고작 9일. 새로운 일하기보다는 업무인수인계에 집중하겠다고 말하며 종이에 사인을 하고 법인장님 방을 나왔습니다. 나오자마자 남편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방금 전 퇴직인사를 했던 팀장님에게 의도치 않은 퇴사소식을 알려주며집에 갔습니다.
월요일 회의 자료 때문에 금요일마다 매번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있던 제가 가장 빨리 퇴근하던 금요일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