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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May 22. 2024

마무리까지 뭐 같네

수미쌍관인 건가

'수습기간 종료 통보'의  충격을 애써 다독이며 주말을 보내고 나니 또다시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월요일 8시 반에는 법인장님과 하는 팀장 전체회의가 있었습니다. 기획팀 팀장님의 리딩하에 금요일에 취합한 내용으로 각 팀이 발표를 하는 시간이죠. 저도 주까지 매출실적 액션아이템의 진척사항을 발표했습니다. 1월 매출은 전년대비 2배 이상 목표 대비 몇십 프로 초과 달성한 상태한 상태라 지지부진 다른 채널 사이에서 눈에 뜨였죠. 모든 발표자료가 끝나자, 법인장님께서 사람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더라고요.


제가 다음 주까지 하고 그만두게 되었다며 좋은 성과를 내줘서 고맙다네요. 그리고 바로 뒤이어,  새로운 사람이 앞으로 둘이나 올 거라며 밝게 이야기를 이어가시더라고요. 저의 자리로 오는 사람은 경쟁사에서 같은 업무를 했던 경력이 풍부한 시니어급 매니저인데, 4월에 오니 제가 떠나고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 빈자리가 없는 것처럼 남은 인원들이 최선을 다해달라네요. 저한테는 금요일 오후 늦게 인사팀과 함께 얘기하시고 바로 사인받아가더니 월요일 아침에 바로 전체 공표라.. 참 급하기도 하셨나 봅니다. 그 미팅이 끝나자, 오후 출장 때문인지 이제 제가 관심 밖이라 그런지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시 더라군요. 끝까지 미안하다, 괜찮냐는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죠.

 

미팅이 끝나자, 예상치 못한 공지에 사람들이 저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우직하게 맡은 일을 해주던 물류팀 팀장님은 되려 잘 되었다네요. 목요일에 하는 다른 회의 때는 안 그런데, 월요일 팀장급회의 때마다 제 표정이 곧 죽을 것만 같았답니다. 


법무팀장님은 괜찮냐고 묻더니 언제든 자기가 필요하면 이야기를 하랍니다. 시간 될 때 자기 방으로 오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지만 "나는 너의 편"이라던 그 말이 진심이었나 봅니다. 상황을 듣더니 위로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실업 후에 해야 하는 일들을 시간 내서 알려주더라고요.


그리고 CFO 담당하시는 주재원님도 방으로 오라고 따로 불러내시오. 지난번, 부가가치세 때문에 소동을 벌인 후 제가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드리고 본인도 마음이 안 좋았다며 마음도 터놓고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그 이후로도 자주 찾아갔고, 최후통첩을 하고 나서도 바로 가서 상의를 드리기도 했었죠. 방으로 들어가자 저를 보시며 '이렇게 된 거 미리 이야기하기 못 해서 미안하다'시네요. 본인은 법인장님이 새로 사람 뽑자고 할 때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이제 좀 적응해서 잘하고 있는데 굳이 새로 뽑아야겠냐고 하셨지만 그냥 뽑겠다고 하셨다더라고요. 근데 미리 얘기해 줄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고. 뭐 CFO이 미안하실게 뭐 있나요. 설사 그분이 절 자르라고 했던들 결국 결정은 법인장이 하시는 건데. 고생만 하다 가게 해서 미안하시다면서 저녁도 한번 제대로 못 사줬다고 날짜를 잡으시더라고요.


그리고 프로모션 비용관리하시는 팀장님도 오셔서 회의 때 이야기 듣고 너무 깜짝 놀랐다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내용을 전해 듣고는 같이 대신 분노해 주시며 어디 가도 잘했을 사람인데 이렇게 되어서 너무 아쉽다고 위로해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월화수, 마치 앞으로도 계속 일할 것처럼 일상은 흘러갔습니다. 해야 하는 미팅들을 해내고 요청받은 사항들을 해내면서 그렇게요. 그 와중에도 하던 일들은 마무리지어서 줘야 하니까 이제까지 했던 파일들 중 최종 버전을 만들어 공용디스크에 입수인계 폴더를 만들어 넣어놓기 시작했고요.  사실 제가 초반에 아무것도 못 받은게 그래서 이미 모든 파일은 온라인몰 전용 디스크를 만들어서 내용별로 분류해서 폴더별까지 넘버링을 해서 정리해놓고 있었습니다. 워낙 파일이 많다보니 알기 쉽게 정리해주기 위해 제일 중요한 내용들만 모아서 인수인계 폴더에 넣고 엑셀에 할 일과 진행사항 관련된 사람, 각종  회의들의 안건과 일정등을 적어놓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목요일 아침 8시, 법인장님이제 앞으로 관련 인원 참조를 넣어서 메일이 보내셨네요. 해외 출장을 가신 터라 월요일 팀장급회의 이후에 따로 얘기를 한 적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온라인몰 KPI가 매우 크리티컬 하니, 다음날인 금요일 10시부터 2시간 동안 워크숍으로 리뷰를 하시겠다네요. 그 밑으로 1부터 9까지 넘버링을 해서 온라인몰 연간 월별 목표, 1년 치  온라인몰 패널의 주별 타깃 및 예산 계획, 연간 프로모션 계획부터 올해 key action plan이니 법인전체의 KPI 과제로 잡힌 고객경험 과제들 등까지 죄다 넣어서 놓으셨더라고요.


빨리빨리의 나라 한국도 아니고 약속과 기다림의 나라 스웨덴 아닙니까? 당장 다음날 워크숍 잡는 것도 좀 당황스러운 일인데,  많은 걸 다음날 리뷰하겠다니요. 그나마 월화수 정신 다잡고 인수인계용으로 정리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냥 평소처럼 일하다가 저 메일을 받았다면 그날 밤을 새워도 완성하기 힘든 분량이었습니다. 기존 자료를 다듬는 수준의 자료도 있었지만 어떤 건 시간이 걸려서 내용을 생각해서 채워나가야 하는 것도 있고 제가 힘들게 몸을 부딪혀가면 알아냈던 걸 바탕으로 정리해야 것도 있었던 탓이죠. 목요일도 두 개의 미팅이 있었기에 일단 메일을 받고 미팅과 미팅 사이에 필요한 파일들은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퇴사 1주일 남았지 않습니까? 온라인몰 KPI가 크리티컬 하든 말든 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어차피 본인이 자르셔서 전 다음 주에 나가서 실행할 것도 아닌데 제가 왜 올해 KPI를 어떻게 해낼지를 리뷰해야 하나요? 보나 마나 파일을 가지고 '이건 왜 이러냐 저건 왜 이러냐, 이렇게 해서 되겠냐 안 되겠냐' 이런 얘기를 할 텐데 어차피 관련도 없는 제가 그런 챌린지를 당할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 길로 인사과와 법무팀을 찾아가서 이런 메일을 받았는데 내일 당장 이 9개나 되는 안건을 가지고 워크숍을 하라는데 내가 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해고통보를 하면 더 이상 새로운 일은 주지 않고 업무인수인계에만 힘쓰게 하는 게 맞답니다. 그리고 잘린 것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업무 시간에 다른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도록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갈 수 있도록해야 한다고요. 물론 고용주 측에서 지금과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도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답니다.


아무리 예의 없이 잘렸다고 해도 '인수인계는 잘해주겠다' 했던 내 말을 지키려고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가려고 했던 마음이 차갑게 식으면서 더 이상 얼굴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커지네요. 사람이 가만히 있으니까 정말 가마니로 아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1번부터 9번까지 각 안건별로 담당자를 지정한 뒤 관련 파일에 넘버링을 해서 메일을 보냈습니다. 1주일도 안 남은 상황에 제가 리뷰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 관련 파일과 담당자를 공유한다고요. 그리고 전 금요일과 월요일 몸이 안 좋아서 휴가를 내겠다고 덧붙였죠.


사람이 참 이상한 게 병가 이야기를 쓸 때만 해도 스트레스 많이 받고 화가 나긴 해도 휴가를 쓸 정도 몸이 안 좋진 않았거든요. 막상 금요일이 되었는데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불렀는지 계속 설사를 하고 난리네요. 5개월여 만에 첫 휴가였는데 아무것도 못 먹고 아무 데도 못 나가고 집에서 누워있었네요. 이 증상은 출근하기로 했던 화요일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어차피 법인장님은 또 다른 해외출장을 가셔서 만날 일이 없고, 출근일도 3일밖에 안 남았으니 인수인계도 하고 빨리 정리하자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네요. 근데 법인장님한테 메일 한통이 와있네요?


힘든 건 이해하지만, 책임감과 프로페셔널함을 보이랍니다. 그리고 저의 계약기간은 28일까지이며 제가 휴가를 가도 재택근무하기로 하지 않았냐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랍니다.


우와, 사람이 이렇게까지 간다고? 이미 종료계약서 사인할 때 다음 주 목요일이 마지막 근무일로 하겠다고 이야기했고 알았다고 해놓고, 잘린 마당에 나보고 휴가 가서 재택을 하란다고? 심지어 계약 종료일 이후에 한국에서 들어오는데?

이제까지 내가 퇴근해서도 주말에도 심지어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12월 31일 밤부터 1월 1일 새벽까지 일 제대로 해내려고 개인시간 다 희생해 가면서 일했는데.. 그런 나를 잘라놓고 나한테 책임감과 프로페셔널함을 운운한다니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자를때는 스웨덴식으로 잘라놓고 자른 뒤에는 한국처럼 나가기 전까지 꽉 채워서 열과성을 다해서 일하길 기대하는 건가? 너무 화가 나니까 왼쪽 갈비뼈 아래에 있는 장기가 쪼여오기 시작하는데 아파서 허리를 제대로  못 피겠더라고요. 통증을 줄이려고 손바닥으로 그 부분을 꾹 누르면서 어기적어기적 걸어 법무팀과 인사팀 찾아갔습니다.

 

인사팀에게 우리 분명 종료계약서 사인할 때 8일이 마지막 근무일로 하기로 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도 기억난답니다. 그런데 이런 메일을 받았다. 내가 이 요구를 들어줘야 하냐고 물었더니, 법무팀과 인사팀 모두 그럴 필요 없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싸웠던 법무팀인데, 제 몸 너무 안 좋아 보인다고 본인이 태워다 줄 테니 당장 병원을 가랍니다. 회사 입사한 이후로 제가 살이 너무 빠졌다며, 회사 신경 쓰지 말고 병가 내고 쭉 쉬다가 한국 가라네요.


회사생활하다 보면 전략적으로 어떤 사람을 업무에 투입시킬 수도 뺄 수도 있습니다. 자를 수도 있고 채용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생길 잡음을 최대한 줄여서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하겠죠. 하지만 제가 느꼈던 마지막은 아주 무례하고 거칠기 이를 데 없었죠. 사정을 전해 들은 지인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전임자도
인수인계 제대로 안 해줬나 보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는 제가 온 날 자신이 그 업무에서 빠지게 되는 걸 알았고, 법인장님과 대화한 뒤 1주일 동안 병가를 냈으니까요. 심지어 업무에서 빠진 것만 해도 저런데 제 상황에서 누가 인수인계를 제대로 해주고 싶겠습니까. 심지어 저한테 바보같이 거기서 1부터 9까지 넘버링해서 파일은 왜 만들어 주냐고, 있던 파일도 지우고 갈 판이라고 말한 사람들도 많았죠.



그런데 이렇게 가면 진짜 똥 싸고 밑 안 닦은 기분이 들 것만 같은 겁니다. 그래서 점심도 거른 채 아픈 몸을 이끌고 인수인계 파일 완성해서 같은 팀 신입사원에게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양식에 어떻게 자료를 업데이트해서 정리하면 되는지. 거기에서 어떤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지, 어떤 조치를 취해줘야 하는지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화요일 오후, 근무일이 이틀 남짓 남은 상황. 아픈 몸으로 인수인계를 하고 있는 와중에 5개년치 계획을 보고하는 자료에 내용 좀 채워 넣어달라고 연락이 오질 않나. 이제까지 하지도 않은, 앞으로 할 새로운 일을 알려주면서 인수인계 파일에 넣어서 후임자에 전해달라고 하질 않나. 임시로 그 업무 대행하게 된 전임자는 제가 하지 않은 일이라고 자세한 건 담당자랑 이야기해 보라고 분명히 써서 공유했건만, (본인은 끝까지 파일 2개 버틴 주제에) 제가 하지고 않은 파일을 달라고 아니면 처음부터 "스크래치"난다고 뻔뻔하게 답메일을 보내질 않나. 아주 대환장 잔치였죠. 


몸이 안 좋아 보이니 빨리 가라는 사람들과 하나라도 더 시키려고 일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힘겹게 인수인계를 하는데, 자리가 없다던 병원에서 당장 오면 진료를 볼 수 있다고 연락이 오네요. 같이 있던 신입사원이 빨리 가라며 등을 떠미는데 마지막까지도 더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을까, 법무팀 말처럼 이대로 쭉 쉬고 한국을 갈까를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내가 못 오게 되면 노트북 좀 반납해 달라고 하면서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황급히 간 병원에서 받은 진단명은 스트레스성 위경련. 약을 처방해 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랍니다. 필요하면 그 주까지 쉬라는 진단서를 떼어줄 수 있답니다.


수요일. 공식적인 진단서도 있도 몸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직장인의 책임감 때문에 가야 하나 말아야를 고민했는데 때마침 첫째가 40도까지 열이 나네요. 결국 아이가 아파서 못 간다는 연락을 주고 첫째와 함께 쉬었습니다.


목요일. 여전히 컨디션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인데 사람들한테 퇴직인사도 하고 자리도 정리하고 물품도 반납해야겠다 싶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사를 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팀과 법무팀을 만나 근퇴관련해서 확인을 받고 자리와 파일을 정리하기 시작했죠. 점심때는 이제까지 함께 동고동락했던 신입사원과 부가가치세 이슈 이후에 임시로 투입되어서 reconciliations 양식을 재점검해서 만들어주던 파이낸스팀 팀원과 함께 마지막 점심을 먹었고요.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과 모두 인사를 나눈 뒤 불꽃같았던 저의 세 번째 회사 생활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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