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품은 사직서 1
그만둘 거라는 말을 꺼내고 나니 회사 출근하는 겨울의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동지가 가까워져서인지 아직 하늘은 어두웠다. 깜깜했던 하늘이 조금씩 푸른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 회사를 기다렸다. 버스를 30분 넘게 타야 했지만 내리면 회사까지 금방이었다. 도어투도어로 40분 남짓이면 회사에 도착했다. 회사 앞에서 자취를 하지 않는 한 서울에서 이 정도 출퇴근 거리면 정말 가까운 축이었다. 버스를 올라타며, 끝없이 반복할 것 같았던 이 여정도 이제 정해진 숫자만큼만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출구 없는 긴 터널처럼 느꼈던 일상이 이제 깜깜했던 터널을 빠져 나와서 내릴 역을 향해 기차길을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6개월이다.
6개월 후면 여기도 안녕이다.
십 년 넘게 몸담았던 이곳도.
그만 둘지도 모른다는 말은 선우 말고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선우에게 말을 던진 후에도 확고한 결심같은 게 생긴 건 아니었다. 겨울이 다시 한번 용기를 내 회사에 그만둔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남을 것이다. 익숙한 걸 그만두는 건, 계속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회사에서 힘들고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냥 있으면 그대로 있으니 말이다.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었다. 이 회사와 함께 한 게. 이보다 더 오래 다닌 데가 있었나? 어떤 학교, 어떤 학원, 어떤 동호회보다 오래 다녔다. 부모 세대처럼 청춘을 이 회사에 바쳤다고 말은 오버였지만, 어쨌든 겨울의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그리고 젊고 아름다웠던 20대와 30대를 이 회사와 함께 했다. 첫 월급을 줬고, 선우를 만나게 해 줬으며, 그렇게 받은 돈을 모아 결혼을 했다. 남산만 하게 불러 온 배를 손으로 감싸안으며 만원버스에 탔고, 지하철에 꾸겨져 들어가면서도 출퇴근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임신 소식은 마음을 다해 축하해 주지 못했을지언정 출산하러 들어갈 땐 예쁜 아이 낳으라며 꽃다발과 선물을 주며 따뜻한 배웅을 해줬던 곳이다. 머리와 손이 굳은 채 복직해도 구원천사처럼 반갑게 맞아줬고, 겨울도 언제 집에서 아이와 씨름했냐 싶게 회사에 녹아들었다. 아무리 회사 욕을 한데도 안온한 자리였는데, 그 자리를 스스로 놓으려고 하다니 마음이 이상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횡단보도 너머로 회사가 보였다. 십여 년을 매일 봤던 건물이지만 건물 위쪽에 붙어있는 회사 로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초록색 신호가 켜지자 길을 건너 문으로 들어갔다. 하얀색 정장을 입은 직원이 서있는 안내 데스크를 끼고 돌아서 검은 옷을 입은 보안 요원들이 지키고 있는 보안게이트에 사원증을 찍었다. 삑 소리를 들으며 익숙하게 안쪽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또다시 사원증을 들어 찍었다. 띠가 하는 소리가 나며 잠금이 풀린 문을 밀고 들어갔다. 자신의 자리로 들어가서 노트북 거치대 밑에 있는 키보드 옆에 목줄이 돌돌 감겨 있는 사원증을 내려놓았다.
어디선가 본 한 인터뷰가 기억났다. 회사원이 잔뜩 지나가는 도로 위에서 20대 그녀는 점심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목에 사원증을 한 회사원들이 한 손에 유명 커피 체인의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다니는 게 그렇게 부러웠다고 말했다. 아무리 비싼 커피라고 해도 한 끼 식사를 거르면 살 수 있었지만, 사원증은 돈을 준다고 살 수 없다. 회사 마크가 박힌 사원증을 손에 넣기까지 겨울도 수십 번 지원을 하고 면접을 봤었다. 마지막 한 달짜리 인턴이 합격 전 마지막 프로세스였는데, 그때 임시로 받은 사원증을 보며 꼭 진짜 사원증으로 바꾸겠다고 다짐했었다. 비록 중간이라도 감지덕지인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지만, 겨울도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백몇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했었다.
그렇게 회사를 재밌게 다닌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늘 힘들고 속상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올 1년은 번아웃이 올 만큼 정신없이 보냈지만 커리어도 육아도 못 잡은 채, 부모님께 회사에 폐만 끼치는 느낌이었다. 회사를 다니며 아이 둘을 키우는 게 힘들어서, 아빠 없이 있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마음 아파서, 그리고 선우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어서, 그만두는 게 맞는다 생각한 거였다. 그런데 막상 그만둔다 생각하니 겨울의 인생의 일부를 떼어내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더 이상 동동거리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면 시원한데, 이제까지 한 몸같이 말하던 회사이름을 뗀 채 나를 소개해야한다 생각하니 괜스레 울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