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랑연두 Nov 14. 2024

포기할 결심

진짜 버티는 게 이기는 걸까? 6

혼자서 애들도 키우고 회사도 다니는 건 쉽지 않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둘이 함께 해도 쉽지 않았는데 혼자 하는데 안 힘들 리가 있나. 엄마 손을 빌려가며, 퇴근 후 모든 시간을 쏟아가며, 버텼는데 나쁜 고과라니. 겨울은 올해보다 내년에 더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한계에 다다랐다.

애들 재워놓고 가끔 거실에 혼자 나와 앉아있다 보면 나는 뭘 위해 끝없이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지금 내가 힘겹게 잡고 있는 커리어가 진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겨울에게 큰일이 없다면 계속 이 회사를 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쩌다 운때가 맞으면 팀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힘드리라. 아마도 운때가 맞지 않아 계속 만년과장신세로 있다면 다른 팀으로 보내질 것이다. 겨울이 있는 브랜드팀은 나름 회사의 핵심부서였고, 그만큼 승진도 빨랐다. 다른 사업부이긴 하지만 벌써 겨울의 동기가 상무를 달지 않았나. 같은 사업부에서도  팀장단 동기가 있었고, 후배도 이번에 팀장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 많은 부하직원은 부담스럽기에 겨울보다 더 나이 많은 팀장이 없어지면 아마도 다른 부서로 가게 될 것이다. 아마 그렇게 어디론가 떠밀려 가게 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분명 자존심도 많이 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지금 같은 일이 여러 번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내도, 후배들의 승진을 위해 희생해줘야 하는 일들.


하지만, 가늘고 길게 다니고 싶다면 그 길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더 치열하게 일하기에 겨울이 챙겨야 할 것은 너무 많았고 그걸 다 팽개치고 일할 정도로 애정이 크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임원이 되는 건 극히 소수가 아닌가. 대부분은 열심히 하지만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다니다가 회사를 그만두니까.

이 회사에서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직이라는 옵션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미 손바닥처럼 아는 회사에서도 애 키우면서 능력을 발휘하기 버거운데,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건 그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겨울이 가장 지켜야 할 것이 바로 그 시간이었다.

선우가 돌아오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면 둘이서 고군분투하며 애를 키울 것이다. 출퇴근만 편도로 한 시간씩 걸릴 거고, 예전에 그랬듯 야근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을 보낼지 말지를 고민할 거고, 학교를 들어가면 퇴근 전까지 집에 오지 않도록 학원 스케줄을 짜줄 것이다. 한자급수를 따기 위해 한자를 외워 시험장으로 들어갈 것이고, 수를 좋아하는 하준이를 때마다 수학경시대회로 데려갈 것이다. 영재원에 들어가기 위해 자료를 찾고 학원을 보낼 것이다. 선우와 겨울이 그랬듯이 아이들의 십 대는 대학입시만을 위한 긴 터널에 넣어질 것이다.

무엇을 위해 가는지 모르면서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겨울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열심히 움직여도 조금씩 뒤쳐지는 삶. 주위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해야 하는 일상. 학교 다닐 때는 늘 잘하는 축에 속했는데 지금은 중간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상황이 겨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다른 부모, 학군지의 과열된 사교육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겠지. 그저 뒤처지지 않기 위해. 또는 좀 더 앞서나가기 위해. 하지만 상황을 바꾸긴 힘들었다. 그저 뒤처진 자신을 받아들이고 견뎌내며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게 지금 상황에서 겨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선우는 하루를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쓸 수 있었다. 원래도 워커홀릭 기질이 있던 선우는 회사에서 퇴근해서 집에 가면 늦게까지 일을 하다 잠이 들곤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다른 회사에 지원했다. 코딩 시험을 보고, 인터뷰를 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최종 오퍼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서 처음 이직을 고려할 때 마음에 품었던 글로벌 IT기업 중 하나였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해서 커가는 중이었던 지금 회사와 달리, 제시하는 연봉도 올라갔다. 문제는 지역이 여전히 스웨덴이라는 점이었다. 겨울은 이미 한차례 스웨덴에서 구직활동이 실패한 터라, 다시 가도 괜찮은 자리를 찾아 일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선우가 계속 스웨덴에 있을 거라면 이직하는 게 맞았다. 망설일 어떤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직을 한다면 커리어관리를 위해서 못해도 2년은 같은 회사에 있는 게 맞았다. 그 이야기는 겨울이 움직이지 않으면 최소 2년은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겨울은 선우가 이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우라도 커리어적으로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겨울이 임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커리어에 타격을 받은 만큼 선우도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승진의 기로에서 한 발짝 물러서게 됐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그 또한 선우가 원하는 직업적 이상향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둘 다 엉망인 것보다는 하나라도 원하는 커리어 만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싶어 이직에 찬성표를 던졌었다.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계획이 선 건 아니었다.

근데 겨울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나쁜 고과를 받고 나니 겨울은 굳이 자신이 한국에서 계속 회사를 다녀야 하나 싶어졌다. 겨울은 선우가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 수습기간 끝나면, 아이를 데리고 스웨덴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전 26화 어떻게 해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