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게 진짜 이기는 걸까? 4
12월 다가오자 각 팀에서는 연초에 넣어놨던 KPI에 자기 평가를 입력하느라 바빴다. 겨울은 이 Key Performance Indicator의 약자인 KPI 평가가 참 웃겼다. 다른 회사는 안 그럴수도 있겠지만, 겨울이 다니는 회사에서는 매번 평가시즌이 되면 KPI(성과 목표)도 같이 수정했다. 연초에 정했던 목표는 그 해의 시장변화를 반영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해든 관계없이 목표 숫자는 늘 중간에 바뀌었다. 잘 되면 잘 되는 만큼 늘어났고, 못 되면 못 되는 만큼 줄어들었다. 하지만 어떤 브랜드 목표를 얼마큼 조정할지는 윗분들의 정치싸움의 결과였다. 그렇게 조정된 목표를 바탕으로 자기 평가를 입력하니, 말만 자기 평가지 실상은 윗분이 바라보는 브랜드팀의 평가와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차이는 각자 담당한 채널과 신제품이었다.
하지만, 지금 겨울이 속한 팀은 특이했다. 그전까지는 팀의 공통 목표가 있고 각자 담당하는 판매채널과 신제품의 목표를 넣는 개별 목표가 따로 있었다. 아마 거의 모든 팀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팀장은 모두의 목표를 동일하게 넣으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신규 라인을 출시한다면 그 내용은 개발 담당자 KPI만 들어갔다. 제일 고생을 많이 하니 잘 되었을 때 그 성과를 그 사람이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고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팀장은 그게 아니란다. 개발담당자가 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위에서 다른 잡일을 대신 해주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또 아무리 좋은 제품들을 만들어도 다른 팀원들이 담당하는 판매 채널에서 잘해주지 않으면 성과가 나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그러니 누군가 신규라인을 성공적으로 론칭했다고 해도 그건 혼자만의 성과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새로운 평가 방식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아무리 윗분들 입맛대로 쓸수 밖에 없는 허울 뿐인 자기 평가라지만, 전 팀원이 다 똑같은 점수를 매기게 만드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차피, 하나의 팀, 하나의 목표, 하나의 평가점수래도 결국 최종 고과는 다르기에 더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11월 임원 평가할 때, 사업부의 고과는 정해진다. 사업부 고과와 연동되어 사업부 산하의 부문별 실적을 정하고 그 실적과 함께 고과별 티오가 나왔다. 그렇게 받은 좋은 고과와 안 좋은 고과 수는 다시 팀 단위로 나눠졌고 팀장은 그걸 팀원들에게 나눠줘야 했다. 그런데 겨울의 팀은 개인평가가 똑같으니 결국 고과는 팀장이 주는 평가에 달려있었다.
12월도 일주일쯤 지나자, 팀장은 겨울을 따로 불렀다. 드디어 평가를 마친 것이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가고 난 올 초부터, 겨울은 몸이 부서져라 버텨왔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 점심도 많이 걸러가며 일했다. 남들보다 1시간 일찍 퇴근했지만 법정근무 시간 8시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한 적은 없었다. 퇴근해서 애들과 한참 씨름하다가 겨우 재워놓고 컴퓨터를 켜고 밀린 일을 한 적도 많았다. 하루를 쪼개가며 보내도 집은 늘 난장판이었고, 그렇다고 회사일에 올인하는 사람처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보통은 해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겨울이 맡은 직영점은 전체적으로 시장 자체가 줄어들고 있어서, 매출 자체는 전년보다 작았지만 감소폭은 시장평균이나 같은 회사 내의 다른 브랜드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팀장은 겨울에게 안 좋은 고과를 주겠다고 말했다. 6명의 팀원 중 한 명은 올해 신규라인 론칭하느라 맨날 야근하며 고생을 많이 했고 결과도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또 혜원 씨는 내년 승진 대상자이니 좋은 고과를 줘야 한다. 새로 팀에 합류한 선영 대릴 포함한 나머지 두 명은 내후년 승진 대상자이니 전전년 고과를 나쁘게 줄 수 없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이미 작년에 나쁜 고과를 받았으므로 또 줄 수가 없다. 겨울의 회사에서 연속으로 나쁜 고과를 받는 것은 회사를 나가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비록 그 해의 성과가 조금 부족했더라고 나쁜 고과 다음 해에는 최소한 중간은 주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겨울은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일 잘했다고 말하기는 아쉬워도, 꽤 열심히 했다는 말은 들을 만큼 했던 한 해였다. 직영점 채널 영업 부문 회의 때 영업부문장이 다른 브랜드담당을 깨면서 겨울이 하는 거 보라고 했다는 말까지 전해 들은 터라 평균 이하의 고과가 더 속상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비추자, 팀장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생각할 때 겨울은 과장으로서 그 이상의 성과를 보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좀 더 팀의 맏언니답게 팀원들도 다독여주고 도와줘가며 성과를 낼 수 있게 도왔어야 했단다. 겨울에게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였다. 한 해 동안 수없이 팀장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런 목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공유되지 않았던 팀장의 히든 목표를 못 해냈다고 고과를 나쁘게 주겠다고? 물론 겨울이 맏언니 또는 팀의 구심점 역할을 잘 해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겨울은 일찍 출근해서 일찍 퇴근했고, 업무시간에는 본인 일을 어떻게든 업무시간에 끝내려고 늘 바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겨울이 승진을 한다면 팀장이 되는 것이었고 그런 리더십이 필요한 자리였다. 팀장이 보기에 겨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은 팀장이 보기에 겨울은 어차피 팀장으로 올라가기 힘든 사람이었고. 결국 만년 과장으로 지낸다고 한다면 한해 나쁜 고과쯤이야 어떻겠느냐하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한 해를 버둥거리며 버텨왔는데 결국 올해의 꼬리표가 이 모양인 건가하는 생각이 들자 겨울은 힘이 쭉 빠졌다.
결국 이런 평가를 받을 줄 알았다면
점심이나 잘 챙겨 먹을걸..
애들 재워놓고 일이나 하지 말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