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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Nov 26. 2024

끝없는 망설임

마음 속에 품은 사직서 5

어느새 해가 쨍쨍한 날에는 반팔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지 않은 날씨가 되었다.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5월은 여전히 설, 추석에 이어 대목 중 하나였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까지 화장품을 선물하기 적당한 날들이 많기 때문이다. 선물하기에 적당한 예쁜 무늬를 입힌 기획세트들의 일정을 맞추느라고 모든 팀원이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화장품을 많이 찾는 시기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모든 신규 기획세트의 출시는 비슷한 시기였다.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뿐 아니라, 용기업체, 포장재업체들도 모두 일이 몰려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우리 브랜드 일정이 밀리지 않고 나오도록 만들려면 늘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미리부터 챙긴다고 해도 계속 챙기지 않으면 매출이 큰 브랜드들의 일정에 밀리기 일쑤였다. 회사 전체로는 우선순위가 있으니 어쩔 수는 없지만, 겨울에게는 당연히 자신이 담당하는 브랜드의 자신이 담당하는 제품이 최우선이었다. 이렇게 난리를 치며 제품들을 생산해 물류로 입고하고 나면 또 사업부장님께 하반기와 내년도 계획을 보고하는 시간이 돌아올 것이다.


십수 년째 똑같은 일정, 한 해도 다르지가 않고 반복된다. 매해 내용은 조금씩 바뀌지만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화장품산업은 첨단 기술 산업이 아니다. 화장품회사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효능물질과 새로운 텍스처를 가진 제형을 개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로 세상을 바꿀만한 건 아니었다. 그때그때 트렌드에 맞는 콘셉트와 내용물을 가져다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끌만한 설명과 모양으로 포장해서 파는 소비재 산업일 뿐이다. 어찌 보면 패션산업과도 비슷했다. 새로운 소재나 디자인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워크맨에서 시디플레이어, mp3플레이어, 휴대폰 스트리밍처럼 한번 변화가 시작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기술집약적 산업과 달랐다. 유행만 타지 않는다면 10년 전에 산 코트를 입을 수도 있고, 오드리헵번이 ‘티파니의 아침을’에서 입고 나온 블랙 드레스를 지금 칵테일파티에 입고 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화장품도 그랬다. 늘 새로운 제품이 나온다고 말하지만, 아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 자작나무 수액‘만 해도 그렇다. 보습효과가 좋다는 그 성분은 겨울이 신입사원 때 담당했던 브랜드의 수분라인 콘셉트 성분 중 하나였다. 몇 년 전 화장품 시장을 뒤흔들었던 ‘호랑이병풀추출물’은 또 어떤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상처 난 호랑이가 스스로 그 풀을 찾아서 상처에 발랐다는 이 식물 추출물은 유명한 상처치료제의 유효성분일 만큼 상처 치유에 효과가 좋다 했다. 그래서 겨울이 들어오기도 전부터 만들어진 수많은 제품에서 콘셉트원료로 사용했었다. 단, 이 걸 유행시킨 회사만큼 단독 성분으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똑같은 것이라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오는 산업, 그것이 화장품 산업이었다. 속된 말로 장업계 고인물이었던 겨울은 어느 순간 시장에 나오는 제품들이 하나도 신기하거나 궁금하지가 않았다. 소비자로서 화장품을 바라보지 못 한건 이미 입사 이삼 년 차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한참 동안은 신제품이 나왔다고 하면 궁금해서 찾아보러 백화점이나 드럭스토어를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한 달마다 제품기획팀에서 하는 신제품 공유회 때 보여주는 제품들도 일감 보듯 무감각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래서 좋다는, 이래서 별로네라는 생각 대신, 얘네는 이렇게 말해서 팔아먹으려고 했구나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보면서 겨울은 참을 수 없는 권태를 느끼곤 했다.


마케팅 자료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장에 들어가는 문구들이나, 책자들, 카톡이나 앱, 웹사이트에 올라가는 모든 문구들은 모두 겨울의 손을 거쳐갔다.  ’** 성분으로 피부에 부담 없이 태양으로부터 소중한 피부를 지키세요 ‘ 라든가, ‘누적 판매량 100만 개 돌파’, ‘피부에 생겨나는 작은 얼룩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면’ 같은 문구들 모두 그녀가 써서 업체로 넘긴 뒤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TV광고나 잡지광고처럼 중요한 문구는 광고대행사의 카피라이터의 몫이었지만, 그것 말고도 제품 설명 문구가 들어갈 곳은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건조, 탄력, 주름, 기미, 여드름, 블랙헤드… 피부 고민이 새롭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있는 것 중에 시기에 맞는 고민과 연결된 제품을 현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조금씩 바꿔서 설명할 뿐이었다. 대리 1년 차 때나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이나 내용에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들어가는 제품사진은 어떻고.. 흔히 말하는 콘셉트사진은 제품을 다른 소품들과 함께 놓아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여름이 다가오면, 모래 위에 선크림을 놓고 밀짚모자와 슬리퍼, 선글라스를 배치해서 여름의 느낌이 물씬 나는 사진을 찍는다. 겨울이 다가오면 포근해 보이는 천 위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빨강, 초록 소품들을 늘어놓고 그 사이에 보습제품을 넣어 사진을 찍는다. 십수 년째 똑같다. 예전에는 그 사진이 잡지나 매장 디스플레이용으로 쓰였다면 요즘은 온라인 행사 페이지나 카톡의 푸시 메시지, SNS까지 들어간다는 게 다를 뿐.


지겹다.


자기도 모르게 겨울의 입에서 혼잣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안정적이라는 선생님, 약사, 공무원의 직업을 보면서 마음이 안 갔던 이유가 생활이 너무 반복되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였는데, 밖에서 봤을 때 화려해 보이던 이 업계도 지겹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생 이렇게 보습, 주름, 미백, 자외선차단, 수분, 애프터선케어 그리고 다시 보습 사이클을 돌며 살아야 하나?


회사 다니는 동안 쌓아온 전화 한 통이면 발 벗고 도와주는 인연들이 덕분에,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고 나면 그래 이만한 회사가 어디 있나 싶다가도, 말도 안 되는 윗선의 요구들에 지칠 때면 만년과장인 신세가 처량해졌다. 아이들 문제도 그랬다. 등하원도 엄마가 도와주시니 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그만두긴 뭘 그만 두나 싶다가도, 퇴근해서 식탁에 앉아 엄마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늘 말썽인 손목을 무의식적으로 주무르고 계시는 것을 볼 때면, ’ 점점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께 무슨 짐이냐, 내 새끼 내가 키워야지 ‘ 싶기도 했다. 매번 혼자 놀고 있던 스웨덴과 달리, 리더십이 있고 친구들이 서로 놀고 싶어 한다는 하준이 선생님의 말을 들을 때면, 그래 내 나라에서 살아야지 싶다가도, 같은 나이의 지인의 아이들이 영어로 똑 부러지게 발표를 하고, 공책 한 페이지씩 작문을 해놓은 사진을 볼 때면 이렇게 계속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에게 여름에 그만둘까 봐라는 말을 꺼내고도 겨울의 마음은 5개월 동안 왔다 갔다 했다. 자신의 인생, 아이들의 인생, 그리고 부모님의 일상까지. 모든 게 다 걸려있는 그녀의 결정. 무엇을 선택하든 백 퍼센트 만족은 없을 것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 더럽고 치사한 회사, 내 그만두고 마리라’라고 결심했던 작년 말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가득한 채로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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