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품은 사직서 7
겨울의 대학원뿐 아니라 아이들의 유치원과 학교까지 자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으니 점점 가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힘들어졌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테고, 겨울은 학비 한 푼도 내지 않고 석사 학위를 딸 수 있을 것이다. 2년짜리 석사 과정이 끝난 뒤의 일은 막막했지만,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정말 가는 건가?
겨울은 머릿속에 이 물음이 떠올랐다.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가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회사를 그만두느냐 마느냐가 문제였다.
작년 말만 해도 여름까지 다니고 때려치우고 말겠다던 기개는 다 어디로 갔는지, 막상 그만 둘 생각을 하니 아쉬웠다. 첫째와 둘째를 낳으면서 받은 육아휴직은 거의 다 써서 겨우 몇 개월치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몇 개월 후에 돌아온다 한들, 상황이 달라질 리 없었다. 요즘 대기업에서 무급 육아휴직을 아이당 1년씩 더 주는 곳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겨울의 회사는 아직이었다. 그것만 있으면 딱 2년을 쉬고 돌아올 수 있을 텐데. 어디 회사는 자기 계발 휴가라고 1년씩 무급휴가를 준다던데. 어차피 돈을 안 주는 무급휴가인데도 부러웠다.
곧 6월이니, 이제는 결정을 내릴 때가 되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오랜만에 선우와 음성통화를 했다. 선우와 연락하는 일 자체가 오래된 건 아니었다. 떨어져 있고 난 뒤, 선우는 일어나자마자 문자로 아침인사를 했다. 시차가 여름에는 7시간, 겨울에는 8시간이니, 한국 시간으로 오후 서너 시쯤이었다. 선우는 점심시간이면 점심을 빨리 먹고 화상통화를 걸었다. 스웨덴 점심시간에는 딱 한국 저녁시간이었다. 제일 바쁠 때라서 겨울은 아이들에게 화면 가득 선우가 보이는 핸드폰을 맡기고 집안일을 했다. 아이들은 아빠와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때론 핸드폰만 덩그러니 놔두고 자기 할 일을 하기도 했다. 선우는 겨울과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았지만, 여유가 없어 평소엔 늘 황급히 인사를 하고 끊곤 했다.
오늘은 아이들이 깰 세라 작은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도 유치원도 다 정해졌으니, 새 학기 맞춰 여름에 가는 게 좋겠다고 말을 꺼냈다. 학기 시작하는데 맞춰 들어간다고 하면 8월 중순에는 이동해야 했다. 퇴직한다면 최소 한 달 전에는 회사에 알려야 했고, 가기 전에 이런저런 준비를 하려면 몇 주는 필요할 것이었다. 결국 늦어도 6월 중순에는 회사에 알려야 할 것 같았다는 겨울의 이야기를 듣자 선우는 길게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만둔다는 이야기는 안 꺼내는 게 좋겠어.
무슨 뜻일까? 그만두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데? 겨울은 의아해졌다.
어차피 학교를 가니까, 학업 휴직 같은 게 있냐고 물어보는 건 어때?
학업 휴직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회사에서는 미국 MBA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각 계열사에서 뽑힌 대상자들은 다 같이 모여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며 안면을 튼다고 했다. 영어점수니 에세이, 인터뷰는 결국 본인의 몫이지만, 준비시간을 확보해 주기 위해 팀장들도 최대한 업무적으로 배려했다. 계열사에서 주어진 인원수만큼만 뽑는 만큼 합격을 못 하면 회사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정이 힘들지언정, 합격만 하고 나면 이사비용에, 학비, 월급에 생활비까지 받을 수 있었다. 막대한 비용을 지원하는 만큼 돌아온 후에 최연소 임원에 빛나는 최시현처럼 탄탄대로를 걷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겨울의 입사동기들이 대상자였던 시기에 겨울은 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했었고, 지금 가려는 학교도 회사에서 인정해 주는 미국 top 10 MBA가 아니었다. 근데 굳이 그런 학교를 위해서 회사가 학업휴직 같은 걸 해줄까?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 꼭 물어보라는 선우의 말에 겨울은 반신반의하며 인사팀에 문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