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랑연두 Dec 05. 2024

나 회사 그만 두려고

마음속에 품은 사직서 8

원래라면 비밀을 지켜줘야 하는 인사팀이지만 여기만큼 소문 빠른 곳이 없었다. 겨울이 물어보면 바로 어디 팀 누구 휴직 알아본다더라 하고 이야기가 퍼질 수 있어서 최대한 돌려 돌려 말을 꺼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해외 MBA 외에도 개인적으로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직원들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을까요?
현재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업 지원제도는 선발자를 대상으로 한 해외 MBA와 그룹에서 운영하는 사내 MBA이 있습니다. 각 MBA는 부서장 추천으로 후보자를 선발하며, 해당 선발 과정 및 시기는 하기의 첨부파일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경우, 업무 시간 외에 진행되는 경우 별도의 규정은 없으나 업무에 차질 없도록 부사장과 미리 협의를 하시길 바랍니다.


뭘 바랐던 것일까? 이제까지 모르던 새로운 규정이 나오길 기대한 것일까? 쓸데없이 인사팀에 이름만 팔렸구나 싶어 씁쓸했다. 저기에서 언급한 개인적인 대학원 진학은 아마도 야간 대학원을 말할 것이다. 꽃길일 줄 알았던 회사생활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기 시작하면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이대로 만년 과장으로 살 것이냐 이직을 할 것이냐 아니면 대학원이라도 가서 학력과 인맥을 업그레이드할 것이냐. 그래서 소리소문 없이 야간으로 대학원을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부사장과 협의하라는 인사팀의 메일과 달리, 대부분은 수업이 계속 업무 시간과 겹쳐서 수업을 못 듣지 않는 한 절대 회사에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말 꺼냈다가 책 잡힐까 두려워서 말이다. 웬만하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을 만들지 말자. 잘 나가는 직장인은 못 되었어도 적어도 욕먹는 직장인은 아니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어쨌든 지금 겨울은 대학원을 가고 싶은 게 아니지 않은가, 잠시 일을 멈추고 가족과 본인을 챙길 시간이 필요한 거지.


그만둔다는 말은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회사에 말하기 전에 최측근에게 먼저 알려야 했다. 일단 엄마. 점점 몸 여기저기에서 신호를 보내는데도 나이를 먹을 데로 먹었지만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겨울과 토끼 같은 손주들 챙기겠다고 아침저녁으로 겨울의 집에 오시고 계셨다.


엄마, 나 회사 그만두고 애들 아빠 있는 데로 갈까 봐.


생각보다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들이 지나가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것 같지만 작은 떨림이 묻어 나왔다.


왜?


그냥, 애들도 자기 아빠랑 계속 떨어져 있는 거 그렇고, 나도 애들 키우면서 회사 다니기 힘들고.. 엄마도 몸 안 좋은데 자꾸 힘들게 하는 거 같아서 마음에 걸리고..


겨울의 엄마는 결연한 의지라도 보여야겠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나 때문이라면 괜찮다.
그냥 너 필요할 때까진 애들 봐줄 테니까 회사 계속 다녀.


거기에 애들 영어유치원이랑 영어 학교 자리도 났어,
여기서 영어유치원, 국제학교 보내려면 엄청 비싼데, 거긴 별로 돈도 안 들어..
나도 가서 노는 건 아니고 대학원에 합격해서 여름부터 들어갈 수 있어요. 배우자 비자라서 학비도 무료예요.


도피처럼 보여서 그러신 건가 싶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있을 건데?


이미 한번 갔다 왔고, 선우도 1년에 한두 번은 왔다 갔다 해서 잊고 있었나 보다. 스웨덴은 그냥 언제든 왔다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겨울의 엄마에게 스웨덴은 직장도 없는 북유럽 먼 나라였다. 잘 다니던 회사도 때려치우고 이 꼬맹이들을 데리고 그 먼 곳을 간다니, 영영 가버릴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일단 대학원 끝날 때까지 2년 있어보고
그 뒤에는 상황보고 다시 결정하려고.


너무 오래 있지는 마라. 2년 있다가는 돌아와.


2년 후에 돌아오면 전쟁 같은 일상이 달라질까? 대학원을 졸업한 후 스웨덴 생활도 물음표 투성이었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한국 생활도 여전히 물음표 투성이었다. 다른 종류의 물음표긴 했지만.




다음날, 수민과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래.. 네가 힘들긴 했지.
같이 키우는 나도 맨날 힘들어서 절절매는데...
그래도 네가 영영 회사메신저에 없을 거 생각하니까 좀 섭섭하긴 하다.


사회 나와서는 친구 사귀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 말을 뛰어넘는 인연이었다. 입사동기로 회사에 같이 들어와서 십여 년을 함께 했던 친구, 수민. 몇 개월씩 차이로 아이들을 가졌던 터라 수민이 출산 휴가 들어간 뒤 겨울이 출산휴가 들어갈 때까지 겨울은 꽤나 허전했다. 그 허전함은 수민이 복직한 뒤에도 똑같이 느꼈으리라. 그렇게 몇 년을 숨바꼭질 하듯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다 다시 서로를 의지하며 지난 게 얼마 안 되었다. 열이 치미는 회사생활이며 고단한 퇴근 뒤 육아생활이며 미래의 고민까지 모든 걸 함께 했던 친구가 더 이상 손 닿는 곳에 없다고 생각하니 수민은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