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기간 6
5월 말, 수업은 5월 초에 끝났고 마지막 남은 과제까지 내고 나니 기다리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겨울방학은 크리스마스 포함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은 대신 여름방학이 두배로 길다. 8월 말에 가을학기가 시작하니, 거의 3달 가까이 쉬는 셈이다. 많은 동기들이 인턴십을 시작했지만, 겨울은 오랜만에 온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6월 초중순이면 첫째도 방학을 시작하기 때문에 곧 그 평온이 깨질 터였다.
아침에 애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 어린이집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면 9시 반이었다. 오는 길에 장이라도 보면 10시 반. 집에 도착한 겨울은 그릇을 꺼내 시리얼을 담았다. 그 위에 요거트를 뿌리고 블루베리를 넣은 뒤 숟가락을 위에 꽂아 들고 소파로 가서 앉는다. 자연스럽게 눈은 커다란 화면을 향한다. 굳이 스웨덴 방송을 볼 일이 없으니 케이블 같은 건 설치하지 않았다. 아무 방송도 나오지 않는 티브이는 있으나마나지면, 이젠 유튜브가 있지 않은가? 한국어로 된 콘텐츠가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나오는 마법의 공간. 유튜브를 보면서 먹다 보니 어느새 그릇 안이 텅 비었다. 더 이상 시리얼이 남지 않은 그릇이지만 겨울은 그릇에서 남은 단 하나의 흔적이라도 없애려는 듯 숟가락으로 긁어댄다. 노력에 비해 숟가락에 묻은 요거트가 하찮아지자 겨울은 그릇 옆에 살며시 내려놓고 리모컨을 든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것 없다고 했나..보이는 영상들이 딱히 재밌어 보이지가 않지만 버튼 누르는 것을 멈출 순 없다.
한참 동안 이 영상 저 영상을 옮겨 다니다가 겨울은 미련을 버리곤 손에 리모컨 대신 그릇을 들고 일어난다. 그릇과 숟가락을 개수대에 넣고는 물을 부어놓는다. 찬장을 열어 물 한 잔을 마시고 큰 컵을 다시 꺼내 물을 가득 담아 창가로 간다. 볕이 좋으니 창가에 놓인 화분들이 싱그러운 초록빛을 한 채 존재를 뽐내고 있다. 물을 주고 오는 길에 발에 뭔가 밟힌다.식탁 주변에 아이들이 흘려놓은 음식물 조각들이 잔뜩 눈에 띈다. 청소기를 들어 구석구석을 밀고는 창문을 열어 집안을 환기시킨다. 청소기 소리마저 나지 않으니 집이 고요하다.음악을 틀고는 커피를 내린다. 해가 따스하고 조용하고 여유로운 시간이다. 겨울이 얼마나 기다리던 시간인가? 어두웠던 겨울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 긴 낮. 방해하는 사람 없는 나만의 시간.
점심을 먹고 난 뒤, 색깔 빨래통에 있는 옷을 꺼내 세탁기에 넣고, 건조대에 있는 흰 빨래를 걷는다. 스웨덴에 처음 왔을 때는 지하에 있는 공용 세탁실을 썼었다. 세탁실 앞에는 날짜별로 3시간 간격으로 슬롯이 있는 캘린더가 있었다. 빈자리에 자신의 집번호가 써져 있는 판을 넣어놓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세탁시간을 예약할 수 있었다. 툭하면 음식물을 흘리고, 토를 하고 옷에 실수를 하는 어린아이들을 키우면서 정해진 시간에만 세탁을 한다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기저귀를 떼기 시작했을 때에는 몇 번이고 손으로 이불 빨래를 하곤 했다. 그래서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오면서 집을 구할 때는 무조건 세탁기가 있는 집으로 구하겠노라 다짐했었다.
집에 세탁기가 없을 수 있다는 건 겨울이 한국에서 살 때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손빨래할 것도 아니고 세탁기가 없다면 세탁기를 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스톡홀름 시내 쪽에 있는 집들은 웬만큼 큰 집이 아니고는 세탁기가 없었다. 백 년이 넘은 집들이 많은 터라 세탁기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지어져 마땅한 공간이 없기도 했고 누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세탁기 설치도 아파트 조합의 허락을 받아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세탁기가 있으면 대부분 건조기도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공용 세탁실에도 항상 뱅글뱅글 돌아가는 건조기와 옷장처럼 생겨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건조기가 있었다.
겨울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크지 않은 회장실에 세탁기가 겨우 들어가 있었다. 건조기까지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일주일 이 주일씩 기다리지 않고 원할 때는 언제든 세탁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마른 옷들을 개고 세탁된 옷을 널고 나니 어느새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다. 아이들은 겨울이 방학했다는 소식을 듣자 한 시간 일찍 데려와달라고 주문했던 탓에 3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섰다.
소소한 집안일을 하다 보니 자유 시간이 다 흘러가버렸다. 회사 다닐 때는 그렇게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그냥 날아가버리는 것 같아 마음한구석이 무거워진다.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서 못 했던 일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냥 이렇게 날려버리다니 하는 생각과, 이렇게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시간 낭비하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텐데 하는 생각이 마구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편한데, 분명 편해야 하는데 불안함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