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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평온

유예기간 7

by 노랑연두 Jan 22. 2025

하지만, 평온한 나날은 이내 끝났다. 현지 대학원 졸업장 하나가 더해졌다고 직업을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겨울을 쉬도록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이 끝나니 낮시간이 비었다. 그렇다며 저녁에 두 번밖에 못 갔던 스웨덴어수업을 낮시간에 매일 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바로 메일을 보내 시간대를 바꿨다.


마케팅이라는 직종은 생각보다 더 언어적인 감각을 필요로 한다. 제품에 쓰여있는 문구들이며 인터넷에 있는 제품 페이지의 설명 문구까지 모두 마케터의 손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런 건 카피라이터가 쓰는 게 아니었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물론 돈을 많이 들여서 찍는 광고문구들은 외부 카피라이터가 쓴다. 하지만, 생각보다 제품을 설명하는 혹은 행사를 설명하는 문구들이 필요한 곳이 많다. 그 모든 것을 카피라이터에게 줄 수는 없기에 대부분은 마케터들이 그 일을 담당한다. 신입시절 자신이 쓴 문구들이 소비자에게 그대로 나간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했다. 고작 입사한 지 한두 달밖에 안 된 생초짜가 무슨 실수를 어떻게 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하지만 다행히 겨울이 다니던 회사에는 문안을 검수해 주는 팀이 있었고, 이 팀에서 식약처에서 정한 가이드라인에 벗어난 표현을 지적해 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매력적인 문장을 만들어주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이 혹할 만한, 후킹할 만한 문구를 만들어내는 건 마케터의 몫이었다.


하지만 약 9개월 동안 배운 겨울의 스웨덴어는 초등학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교실 밖에서 간단한 인사말과 자기소개 말고 다른 이야기를 스웨덴어로 내뱉기 시작한 건 꽤 최근 일이었다. 듣기나 읽기는 그래도 수업을 따라갈 만했지만, 말하기나 쓰기는 버거웠다. 비슷하게 시작했어도 확실히 유럽 애들이 스웨덴어를 빨리 배웠다. 특히 독일이나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이 몇 달 만에 막힘없이 스웨덴어를 내뱉는 걸 보면서 질투조차 할 수 없었다. 문법도 비슷하고 겹치는 단어들도 많아서 거의 무에서 시작하는 겨울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스웨덴어를 배우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국어와 스웨덴어가 밀접성만은 아니었다. 틀리는 걸 부끄러워하고 모르는 걸 물어보는 걸 꺼리는 문화도 언어를 익히는 데는 쥐약이었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한국, 일본, 중국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스웨덴어를 배운 지 3개월이나 되었으려나? 물건을 사는 것과 관련된 표현을 배울 때였다. 가격, 사다, 지불하다, 돈을 벌다, 수입, 저축 등 관련된 몇 가지 표현을 배우더니 그걸 가지고 옆사람과 경제에 관련된 주제로 이야기를 하라는 게 아닌가? 겨울과 옆자리 중국학생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배운 표현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번갈아가면서 읽었지만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놀라운 건 그 둘을 뺀 나머지 그룹들은 어설픈 스웨덴어지만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앞쪽에 구불거리는 머리가 마치 예수처럼 보이는 브라질 학생하나는 손을 들어 선생님을 불렀다. 나는 저금 대신 주로 주식에 투자한다고 말하고 싶은 데 그 말은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다. 지문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것도 신기했다. 한국 같았으면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나 완벽하게 연습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쓰기도 마찬가지였다. 단어하나를 쓸 때마다 시제가 맞는지 수 일치가 되는지 신경 쓰다 보니 문장을 쉽사리 쓸 수가 없었다. 같은 반인데도 막힘없이 줄줄 말하고 줄줄 써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경외감까지 들었다. 겨울은 글 쓰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쓰기 시간에 20줄 남짓밖에 안 되는 한쪽을 써 내려가는데 40분씩 걸렸다. 빠른 애들은 이미 30분 전부터 종이를 제출하고 나간 터라 겨울이 다 쓴 글을 낼 때쯤이면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낮시간으로 바꾸고 매일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하자 지지부진하던 스웨덴어 공부도 조금씩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새로 배운 단어를 까먹기 전에 바로 다음날 수업시간에 반복하니 좀 더 머릿속에 남는 느낌이었다. 매일매일 3시간 반씩 스웨덴어를 듣고 말하고 쓰고 읽고 있으니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스웨덴 특유의 억양도, 이상하게만 보였던 å, ä, ö 들도 점점 익숙해졌다. 실력이 느는 게 느껴지자 되레 조급해졌다. 내년 이맘때면 졸업이었다. 그전까지는 어찌 되었든 스웨덴어를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애들이 집에 있으면 스웨덴어 학원에 갈 수 없으리라. 겨울은 돌봄 교실을 신청할 수 없는 한 달 남짓 되는 기간을 빼고는 최대한 스웨덴어를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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