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기간 9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해 알리칸테 근처의 리조트와 스페인 남부의 해변가를 거쳐 그라나다의 아함브라 궁전까지, 관광과 휴양을 적절히 섞은 여름휴가를 보낸 게 언제가 싶게 시간이 흘러 새 학년이 시작했다. 전공수업이 없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3학기에는 많은 아이들이 교환학생이나 인턴쉽을 하고 있었다. 겨울은 이 시간을 졸업 전 스웨덴어를 늘리는데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여유로운 타과 야간수업을 신청한 채, 오전에는 스웨덴어 수업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젠 스웨덴어로 말하는데 조금씩 부끄러움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모든 분야에서 부족함이 느껴졌다. 이민자를 위한 스웨덴어 과정이 끝나고 중등과정으로 올라온 뒤에는 실력의 격차가 더 커진 것 같았다. 예전에 학교 다니듯 매일 내주는 숙제를 꼬박꼬박 해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책도 없이 오는 학생들도 있다. 겨울은 이도저도 아닌 딱 그 중간에 있는 학생이었다. 지문을 읽고 문제에 답하는 문제를 매일 내줬던 선생님 덕분에 매일 스웨덴어를 붙들고 있긴 했지만, 모르는 단어가 많아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대학원을 다니며 스웨덴어 숙제까지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 읽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에 번역기를 돌려 대충 대답만 적어가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원 수업 준비를 만족스럽게 해가는 것도 아니었다. 영어실력도 모자라기는 매한가지였기에 사전을 찾는 시늉을 하다가 번역기를 껴고 말았다. 스웨덴어를 그만 두기엔 불안했고, 둘 다 해내기엔 시간과 열정이 부족했다.
이런 이도저도 아니게 바쁜 시간도 끝나고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대학원 생활의 피날레인 논문 준비가 시작했다. 스웨덴은 특이하게도 둘씩 짝을 지어 논문을 썼기에 파트너를 구하는 게 첫 번째 미션이었다. 지난 학기를 함께 하며 여러 번 같은 조를 했던 스웨덴 친구가 좋을 것 같았다. 현지 사정을 잘 알 뿐 아니라 겨울의 부족한 영어 실력도 커버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아쉽게도 이미 다른 스웨덴 친구와 같이 쓰기로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 타자는 같이 수업을 많이 들었던 중국인 친구였다. 나이차이가 많이 남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화권에서 온 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공감대가 많았다. 그녀는 논문파트너를 구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터라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연말부터 시작된 6개월 간의 사투는 5월 말에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동안 겨울은 파트너와 부지런히 주제를 잡고 가설을 세우고 참고문헌을 찾고 인터뷰를 하고 설문을 돌리고 분석을 해 논문을 썼다. 짧은 영어실력은 곳곳에서 크고 작은 걸림돌이 되었다. 참고할 논문을 읽을 때, 논문세미나를 할 때, 설문을 만들고 논문을 쓸 때. 그때마다 크롬의 자동번역 기능과 번역기가 큰 힘이 되었다. 번역기는 겨울의 대학원 내내 더없이 큰 도움이 된 동시에 더없이 큰 방해물이었다. 겨울은 2년 동안 영어로 수업을 들었지만, 한 문장조차 스스로 쓰길 꺼려했다. 번역기로 돌린 문장은 사실 완벽하지 않은 이상한 번역투의 문장이었지만, 겨울은 그 사실을 눈치챌 만큼의 실력이 없었다. 최소한 본인이 쓴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했기에 더 힘껏 의지했다.
그리고 그렇게 졸업을 하게 되었다. 생활회화만 간단히 할 만한 스웨덴어 실력과 2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도록 늘지 않은 영어실력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