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기간 5
그래도 다시 학생이 된 건 좋았다. 학생이 가지는 특권은 안에 있을 때는 잘 느끼지 못 하지만, 떠나봤던 사람에게 꽤나 달콤한 것이었다. 누군가 뭐 하냐고 물을 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아직은 돈을 벌지 않아도 괜찮았다. 학비를 안 내기 때문에 되려 내야할 학비만큼을 버는 기분도 들었다.
한국에서 대학원생들은 학교에 절어있는 느낌이었는데 여기 대학원생은 대학생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모여서 밥을 먹고, 방학이 시작하기 전에 종강파티 마냥 다 같이 모이기도 했다. 번개처럼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만나 펍에 가기도 하고 해변가에 수영을 하러 가기도 했다. 자취방이나 기숙사에 놀러 가서 파티처럼 놀기도 했다. 십여 년 만에 걱정이 과제와 시험이던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소비심리 위축이나 원자재값 상승 같은 소식도, 계속 걸려오는 전화와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상사도 없었다.
겨울은 대부분의 동기들과 나이차이는 많이 났지만 한국에서처럼 늙은이 취급을 받진 않았다. 처음에는 서로의 나이를 몰랐던 탓도 있다. 서양사람들에게 나이를 물어보는 건 실례라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나 보다. 여기도 친해 지니, 나이를 물었다. 만으로 37살. 열 살 넘게 차이나는 나이를 듣고 나면 화들짝 놀랐다. 많게는 서른 초반에서 적게는 이십 대 중반까지 보았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그 때마닫 겨울은 웃으며 ‘나는 아시아인이잖아.‘라고 대답했다. 나이를 안 다음에도 나이차이를 느끼지 않고 편하게 대하게 해 줬다. 똑같은 학생이라는 게 참 편했다. 회사였으면 챙겨줘야 할 신입사원들과 같은 나이였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부담 없었다. 서양애들이 눈가나 이마에 주름이 더 빨리 생겨서 그런지, 엄청나게 차이 나게 어려 보이지 않았기에 편하게 대하는 동기들이 버릇없어 보이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문화차이, 세대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어릴 적 보던 티브이 프로그램이나 영화, 드라마, 가수나 노래 이야기가 나오면 겨울은 원래도 많지 않았던 말수가 더 줄어들곤 했다. 한 번은 같이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이 한참을 유로 어쩌고라는 이야기를 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유럽에 있는 나라 이름들, 경쟁 같은 이야기를 하길래 무슨 경제나 정치이야기인가 했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문구를 이야기하더니 노래가 좋았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듣던 겨울이 조심스럽게 유로 어쩌고가 뭐냐고 물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세 명이 동시에 겨울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까부터 그 유로 뭐라고 계속 얘기하는데 뭔지 모르겠어서.”
“아, 유로비전? 유럽에서 국가별로 하는 노래 대회가 같은 거야. 나라에서 예선전을 치렀는데 뽑힌 사람들이 나라대표로 나가. 파이널 경연을 할 때는 유럽 나라는 거의 다 티브이로 볼걸?”
다른 유럽 아이가 말을 거들었다.
“약간 올림픽 마냥, 다들 자기 나라 응원하고, 시작하기 전에는 올해는 누가 이길까 예상해보기도 하고 그래.”
검색을 해보니 맘마미아나 댄싱퀸으로 유명한 아바도 유로비전 우승팀이었다. 우승을 하면 유럽 전역에 유명세를 타게 될 정도로 전유럽의 사랑을 받는 꽤나 유서 깊은 노래 경연 대회였다. 마치 겨울의 어린 시절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나 이후의 슈퍼스타 K, 쇼미 더 머니, 프로듀스 101만큼이나 관심을 받는 경연이었던 셈이다. 결국 한참 동안 겨울이 들었던 대화는 각자 응원하는 팀 얘기하면서 의견을 얘기하며 누가 우승할지 점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동기 몇 명이 함께 저녁모임을 한 적이 있다. 라멘을 먹으러 갔는데 막상 가보니 어두운 조명에 벽에 얇은 네온사인으로 만들어진 글귀들로 장식되어 있는 바 겸 레스토랑이었다. 겨울은 역시 어린애들과 다니니 이런데도 와보는 구나 싶어 신기해했다. 한참 음식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애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스웨덴 이름을 외치며 그녀가 지금 저쪽에 있단다. 그게 누구냐고 묻자 눈이 똥그래져서 이름을 또박또박 다시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이름은 낯설었다. 알고 보니 스웨덴에서 엄청 유명한 이십 대 초반의 여자가수가 옆옆 테이블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지금 그 정도의 가수로 유명한 어린 가수가 누굴까 생각하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날을 부르던 시절의 아이유 같은 가수인건가? 아이들 낳고 나서는 뽀로로나 아기상어를 듣느라 어른음악을 듣지 못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드니 새로운 가수를 찾아 듣기보다는 익숙한 가수의 음악을 찾게 된다. 왜 어른들이 7080 가요무대를 봤는지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주말 앞두고는 주말에 뭐 할지를, 주말이 지난 뒤에는다들 주말에 뭐 했는지를 물었다. 기차 타고 여행을 간다거나 데이팅앱인 틴더로 상대를 만나 데이트한다는 아이들 사이에서 겨울의 주말 스케쥴은 하준이 축구교실과 하린이 체조수업에 데리고 가는 것이란게 생뚱맞았다. 부모의 일도 중요하지라고 말하고는 이내 화제가 틴더에서 만난 상대들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는 갭이 보였다. 그래도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과제를 하고 같은 시험을 보는 한, 그 갭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학교를 다닌다는 것 그리고 함께 수업을 듣는 동기들이 있다는 건, 육아휴직을 하고 처음 스웨덴에 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울타리안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 소속감이 꽤나 든든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