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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와서야만 보이는 것들

챕터 5

by 이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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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이 처음 시작한 둥지를 떠나게 되었다. 어쩌면 모임 운영이라는 쉽지만은 않은 길에 호기롭게 덤벼들어 잘 해낸 것은, 학원이 모임을 품어주는 안락한 둥지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학원을 떠나고 나서는 학원이 제공하던 편의들이 사라졌고, 그로 인한 격차는 나로 하여금 이제 진짜 모임 운영이 시작되었구나, 생각하게 했다. 마치 네발자전거의 뒷바퀴를 떼고 안장을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도 떨어진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불안함과 막막함이 밀려왔다.

학원을 나오고 생긴 가장 큰 차이점은 고정적인 모임 장소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가벼운 모임은 학원 로비에서 했으면 됐는데, 이제는 사소한 모임마저 장소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예전처럼 무엇을 할지 큰 생각 없이 모인 토요일 오후, 한산한 학원 주방에서 호떡을 구워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일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매 만남마다 적절한 장소를 섭외해야만 했다. 대형 카페, 늦게까지 하는 카페, 적당히 한산해서 모임을 하기에 괜찮은 카페, 주로 카페들을 찾아나서야만 했다. 장소 섭외부터 공이 들어가고, 장소를 이용하는 데 개인의 돈이 들어가는 부분이어서, 예전처럼 생각없이 모이기보다는,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지, 컨텐츠를 확실히 공지할 필요를 느꼈다. 학원에 소속되어있을때는 부담없이 운영을 했다는 것을 학원을 나오고 나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카페에 모여서는 주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요새는 어떻게 음악 취미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각자 다니는 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방에서 노래할 때 어떤 부분을 신경쓰고 있다거나, 아는 친구의 길거리 공연 무대에 함께 선 이야기를 하거나. 주로 근황 공유를 한 그 시간들은 생각해보니 더듬거리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커피를 내리는 사람들끼리 모여 커피에 대한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헤어지는 것과 같달까. 맘껏 노래할 수 있는 고정적인 공간이 있을때의 모임은 서로 내린 커피를 시음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과 같았다. 학원 공간에는 로비에 무대가 있어서, 모여서 음악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즉흥적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즉흥 공연이 끝나고는 방금 본 서로의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지트가 없어지고 나서는, 음악을 직접 공유하기보다는 어떻게 음악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되면서 음악 모임의 중심이 흐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학원을 떠난 직후, "보드게임 동호회"라고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그 시기에, 우리는 카페를 돌며 온갖 보드게임들을 했다. 달무티, 뱅, 사보타지, 라이어게임... "음악 모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요."라고 장난 섞인 울상을 지으면서도, 몇 시간이고 보드게임을 하며 자정이 돼버리기 일쑤였다. 그 당시는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모임의 성격이 모호해지는것이 부정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마냥 부정적인 순간만은 아니었고, 어쩌면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시기에 급속도로 가까워진 구성원들이 지금 모임의 코어 멤버 역할을 하고 있다. 음악 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더 컸던 그 시기를 지나며, 서로 즐겁게 놀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확신, 서로 결이 비슷한 이들이라는 확신을 가진 집단이 된 것이다.

모임의 코어 멤버는 시간이 지난다고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들인다고 코어 멤버를 살 수 있는것도 아니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어낸 그 시기는 모임에게는 큰 행운이 따른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학원 공간을 떠나 모임 활동을 시작하면서, 음악 모임의 색채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하던 그 시간은, 지금에 와서 보니 오히려 모임에는 큰 행운이었던 것이다. 모임의 본 목적이 아닌 활동일지라도, 모임원들이 돈독해져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충전할 수 있다면 긍정적인 것이다. 모임원들간의 친목은 모임의 기초 체력과도 같다. 대신 모임원들이 방향성을 잃지 않게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운영진의 몫인 것이다. 당시 나의 고뇌가 방향성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 아니었을까.

고정적인 아지트 없이 카페나 다른 장소에서 모였다. 늦게까지 여는 카페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거나 보드게임을 했다. 음악 모임의 색깔을 잃지 않기 위해, 가끔 음악 근황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고, 더 가끔은 공연을 할 수 있는 장소에 가서 모임원들끼리 작은 콘서트를 가졌다. 연이 완전히 끊기지는 않은 실용음악학원 월말 무대를 채워주기도 하며, 미약하게나마 음악적인 활동도 이어갔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다.

모임은 돈독해졌고, 모임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하지만 음악 모임을 운영하는 입장인 나는, 더 음악적인 활동을 추구하기 위해 아지트가 필요하다는 확신에 어느새 사로잡혀 있었다. 아지트 계약을 막은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비용, 그리고 아지트의 존재로 인해 음악 모임이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루아침에 뭔가 잘못되어 모임이 없어진다면? 계약기간동안 월세를 내야하는 아지트만 남고 모두가 날 떠나간다면? 그런 가능성이 있으니 일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음악을 정말 좋아하면서 결이 맞는 사람들과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고, 지금의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렇게 된 거, 본격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계속 내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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