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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비의 가치

챕터 9

by 이이육

계약을 앞두고 있던 매물 관련자에게는 다른 곳을 계약해야 할 것 같다는 문자를 보냈다. “아... 알겠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답장이 늦었던 걸 보면 다른 연락 중인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의 아지트를 계약한 것이 우리 모임에는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원래 계약하기로 했던 곳이 아지트가 되었다면 지금보다 운영상의 부담이 컸을 것이다. 더 비싼 월세를 충당하려면 어느 규모 이상의 회원 수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고, 비싼 초기 비용 역시 누군가 선정산을 하더라도, 회비를 통해 점점 갚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원래 계약하려던 매물은 비싼 초기비용과 월세를 지불해야 했지만, 지금의 아지트보다 확실히 쾌적하다고 할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상대방은 고민을 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모임원 몇 명과 며칠 전 보았던 4층 건물을 다시 방문하고, 다들 만족하고, 그렇게 계약을 하기로 확정했다. 보증금은 혼자 내려고 했는데, 모임원 두 명이 나눠서 내자며, 몇 번 거절해도 한사코 제안을 해 왔다. 모임을 운영하는 것은 안 써도 될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임과 동시에, 뜻밖의 호의를 받아 힘을 얻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몇 번 거절해도 계속 보증금을 나눠 내겠다는 의지가 강해서, 그렇다면 셋이 운영진을 하면 되겠다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임의 운영진이 구성됐다.

새 아지트가 될 공간의 계약서를 쓰기 전, 몇 가지 조율을 했다. 그중 하나는 2주간 렌트 프리 기간을 얻어낸 것이다. 렌트 프리 역시 공인중개사 친구의 조언이 있었다. 과거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계약할 공간은 꽤 오랫동안 방치된 기색이 역력했다. 일반 사무실이 아닌 모임 공간이기에, 고칠 곳은 고치고 깨끗이 청소한 뒤 회원들을 들이는 것이 이치에도 맞았기에, 임대인에게 2주간 렌트 프리를 요청했다. 임대인은 흔쾌히 허락했다.

2주간 간단히 청소를 하고, 미리 아지트를 오픈하면 될 것 같았다. 허름한 것은 허름한 대로 쓰자는 마인드였으니까. 그런데 운영진 중 한 명이 의견을 제시했다. 벽지가 오래돼 보이고, 오염도 된 것 같으니, 도배를 다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벽지는 때가 탄 누런색에, 군데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이 묻어있기는 했다. 오래된 시골집 같은 분위기가, 조금 더 차분한 톤의 벽지를 바르면 조금이나마 아지트같이 바뀔 것 같았다. 추가로, 커튼도 새것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더했다. 그리고 하나 더 얹어서, 전반적으로 아지트를 뜯고 구석구석 청소를 했으면 하는 의견까지. 적당히 청소만 하고 사용하려 했던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과정이기는 했지만, 입주청소와 도배를 할 만한 컨디션이었기 때문에 납득할만한 의견이었다. 그리고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볼까, 생각에 흔쾌히 OK를 했다. 여태껏 말했듯 지금에만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 보자는 마인드가 내 등을 떠민 것이다. 모임을 하면서 즐거웠던 일은 항상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찾아온 것 같다. 수고스러운 일을 한다는 생각 대신 타인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며 나아가다 보면, 지나온 길에는 항상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번에 그린 그림도 그러했다. 하지만 문제는 재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견을 받아들이고 나서, 거진 2주간은 밤을 지새우며 음악모임 대신 입주청소 & 도배 모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벽지를 바르려면 벽지를 뜯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평생 있을 공간은 아니니까, 대충 위에 발라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는 벽지가 들뜨거나 해서 더 귀찮아질 수도 있는 일이라, 수고스럽더라도 한 번에 제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벽지를 주문했다. 음악 모임의 벽지 뜯기 & 도배 시간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이다. 18평 남짓한 공간. 거실과 방 두 개. 넉넉잡아도 이틀이면 끝날 것 같았다. 완전한 오판이었다. 모든 공간을 다 도배하는 데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계산이 완전히 틀어진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모든 모임원들을 동원하면 일이 금방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귀한 쉬는 날, 노동에 투입이 되는 것을 반길 사람은 없다. 빠지는 사람 없이 모두 모여주었고, 초반에는 열의를 불태우며 벽지를 뜯고, 바닥을 쓸고, 벽지를 발랐지만, 노동이 시작되고 두어 시간쯤 지나자 점점 힘이 빠지는 모습들이 보이고, 벽지가 다 뜯기지 않은 흔적, 벽지를 삐뚤게 붙인 흔적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식으로 치킨을 먹고 나서, 모임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이미 아지트를 구하기로 한 것, 앞으로는 회비를 납부해야 하는 것까지 감수하기로 한 소중한 사람들인데, 필수는 아닌 노동을 하다가 불필요하게 서로의 감정이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벽지를 바르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지트는 좋든 싫든 2년간은 사용해야 하고, 벽지값은 이미 지불을 했다. 날림으로 작업을 하면 투자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도배를 새로 하자고 제안한 운영진은 도배를 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운영진 3인 1조로 팀을 꾸려 남은 공간의 도배를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런 노동이 보통 퇴근 시간 이후, 혹은 주말 일정이 없는 시간대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미 지친 상태로 아지트에 모여 노동을 하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진도가 느리니 조금 더 일해야 할 것 같아 있다 보면 새벽이 되었다. 그렇게 도배에 일주일 정도 걸렸다. 문제는 벽지가 마르기까지 3일이 필요했다. 렌탈 프리를 얻어놓고 기뻐했는데, 지나 놓고 보니 렌탈 프리가 없었으면 월세를 내면서 공사와 청소를 할 뻔했던 것이다.

벽지를 다 붙이고 나서는 심각한 기침감기에 시달렸다. 아마 마스크를 쓰지 않고 벽지를 뜯은 후유증이 온 것 같았다. 혹시라도 오래된 공간을 정리해야 한다면 꼭 분진을 막아줄 수 있는 마스크를 쓰기 바란다. 폐는 소중하니까. 생각해 보니 이것도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음악 모임을 하려고 아지트를 마련하다가 기침감기가 걸려 한동안 노래를 못 했기 때문이다...

앓아누운 동안 나머지 운영진과 몇몇 모임원들은 계속 아지트 정리를 해 나갔다. 바닥과 유리창을 전부 스팀청소기로 닦아내고, 기존 커튼과 커튼고리, 레일까지 다 뜯어내고 새 커튼을 달았다. 다행히 렌탈 프리 기간 내에 목적했던 일은 다 끝낼 수 있었다. 벽지 도배, 커튼 교체, 입주청소까지. 공간을 정비하고 가꾸는 것까지 끝이 났다. 그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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