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2
사실은 운이 아주 좋았던 것이다. 아무런 그림도 없이 되는대로 모임 운영이라는 풀숲을 헤쳐나갔는데, 도착한 곳이 꽤 멋진 곳이었으니까. "되는대로"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대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인 플랜이 없으니, 딱히 이정표가 없이, 못 채운 목표에 실망할 일 없이, 하루의 활동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으로 힘을 얻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를 거듭하며 여기까지 온 것도 있다. 돈을 벌려고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의 자아실현의 일환일 뿐이었다. 머리 싸매는 일 없이, 압박과 스트레스 없이 그저 좋아하는 음악을 주제로 모임 운영을 계속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일까? 모임이 어느 이상 커지니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내내 "어떻게든 되겠지." 정신으로 무장한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해온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모순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모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큰 계획이나 청사진이 없었고,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들을 적용해 보고, 꽤 재미있으면 회차를 거듭해서 진행하고, 그러다가 시들해지면 또 다른 아이디어를 시도해 보고, 운영은 그런 식이었다. 그러한 운영방식이 모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볼 때 체계적인 인상을 주지 못할 수 있고, 그 점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모임을 유지해 주는 것이 체계와 루틴 속에서 추구하는 재미가 아니라, 개인 간의 친목과 간헐적인 이벤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면, 이 모임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이미 친한 이들을 비집고 들어가 적응할 수 있을지, 그런 고민이 될 것 같다.
또 막연히 모임을 만들고 활동을 홍보하면, 주기적으로 페이 공연을 할 수 있겠지, 지자체 지원 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겠지, 조금이나마 고정적인 수입원이 생길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돈을 챙기는 일은 거대한 요행이 따르지 않으면, 허술해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페이 공연과 지원금은, 우리 모임보다 더 체계적이거나, 역사가 깊거나, 혹은 관련 전공을 했거나, 그런 이들에게 돌아갔다. 모임에서 할 수 있는 공연은 반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자그마한 페이 공연, 혹은 페이가 주어지지 않는 무대가 대부분이었다. 모임을 운영하며, 어떻게든 그런 소소한 수익의 기회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이유는 모임원 개개인, 그리고 집단으로서의 모임이 타인이 보았을 때 충분히 매력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히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회는 우리만큼 매력이 있으면서도 훨씬 더 치밀하고 성실한 이들의 것이었다.
왜 운영진으로서 더 치밀하고 성실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왜냐하면 모임은 운영진에게 본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임을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운영진은 각각 두어 번씩 번아웃을 겪었다. 모임이고 뭐고 다 쉬고 싶은 순간들이 돌아가며 찾아왔다. 별다른 사례 없이 봉사 정신으로 운영하는 것인데, 모임의 어떤 부분이 맘에 안 차거나, 혹은 다른 일상의 어느 부분이 숨을 조여오거나, 그럴 때면 짊어지고 있는 모임의 무게가 사정없이 개인을 짓눌렀다. 그렇게 번아웃이 한두 번쯤 운영진을 때리고 가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 모임 운영에 조금은 힘을 뺄 필요가 있다는 것에 공감했다. 모든 책임을 어느 정도 분산했고, 너무 품을 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운영하도록 항상 마음을 다잡고, 그 어떤 것도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연 확장보다는 자급자족으로 모임을 운영하게 되었다. 초기 회원들의 회비 만으로도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모임의 프로그램들을 평가하기보다는 그저 참여하여 즐겁게 하는데에 의의를 두게 되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모임은 어느 정도 고이게 되었고, 좋게 말하자면 모임을 하지 않았다면 생판 남이었을 이들과 친구에 준하게 가까운 사이가 되어 즐거움을 나누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게끔 진입 장벽을 조금씩 허물면서도, 기존 회원들이 재미를 계속 느끼게 하는 것이 모임 운영이 아닐까 싶다. 저전력 운영을 하기로 한 때부터는, 그런 노력이 부족해진 것 같다.
또 한 가지 이야기. 처음 우리 회칙에는 모임 내 공식 소통방 외에 별도의 소통채널을 금한다는 규정이 없었다. 후에 가입한 회원들끼리 밴드를 하면서, 별도의 소통 채널이 만들어졌다. 공식 대화방에서는 대화가 뜸한데, 계속 일부 회원들 간에 모임 내 활동, 그리고 외적인 친목이 이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경고에도 개선이 되지 않자 문제가 되는 몇 명을 모임에서 내보냈다. 모임을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 운영진의 노력으로 애써서 데려온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특정 인원과만 폐쇄적인 친목을 하고, 모임 활동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 것을 방치하면, 모임은 병들어 갈 것이 뻔했으니까. 그리고 내보낸 그들을 따라 그 단톡방 멤버 전체가 모임을 떠났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믿고 있었던 것이 독이 되었다. 상식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라도, 조금이라도 일어날 소지가 있다면, 구구절절 덕지덕지 누더기가 되더라도 규정에 집어넣는 편이 좋다. 안 그러면 봉사와 마찬가지인 운영을 하면서도, 일부 인원들이 비상식적으로 모임의 과실을 빼먹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사건으로 한 덩어리의 회원들이 나가게 됐고,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임을 처음 만들었을 때의 회원만 남았다. 앞에서 말했듯, 코어 멤버는 이렇게나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 뒤로 운영진의 운영은 한층 더 방어적이게 되었다. 새로운 이들을 받는 과정이 주는 피로감과, 그렇게 새로운 이를 받아들였을 때 앞으로의 모임 생활이 행복할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을 태워 꾸려나가는 모임인데,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이 행복하지 않다면 지금까지 들인 노력의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에 조금 더 영리하게 규정을 설계했다면, 그리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그때그때 말했다면, 지금도 모임은 계속 커 나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돌아보니 모임이 이렇게 잘 된 것은 여러 겹의 행운 덕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커 나가던 모임은, 위에서 말한 일부 회원 무리가 이탈하고 난 뒤로는 한창처럼 사람을 많이 받지도, 왁자지껄하게 활동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모임이 실패해 버렸을까? 아니다. 비록 쑥쑥 커 나가는 모임은 되지 못했지만, 함께할 때 행복한 이들을 찾았고, 그들과 함께 소소하게 음악을 이어 나가고 있으므로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쓰는 지금 음악 모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책의 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