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Mar 15. 2021

스파이 인형의 증언

간편소설 열하나

조지워싱턴대학교 근처의 성인용품점에서 나를 픽업해 스파이의 세계로 끌어들인 사람은 M이었다. 일반 성인 여자 사이즈의, 공기 주입식 고무 인형을 멀끔한 중년 남자로 보이게끔 변장시키는 작업은 할리우드의 분장 전문가인 CS의 도움을 받아 CIA 기술 지원 파트에서 이루어졌다. 이른바 자유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전사들의 손에서 성공적으로 탈바꿈한 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1982년 12월 어느 밤, 사회주의 체제의 종주국이라 할 소련, 그 수도인 모스크바 시내를 두 대의 차량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달리고 있었다. 앞은 CIA, 뒤는 KGB 차량이었다. 나는 앞 차량의 조수석, 정확히는 검은색 중절모를 쓴 B의 무릎에 놓인 케이크 상자 속에 있었다. 차곡차곡 포개진 상태였던 나는 갑갑한 상자에서 벗어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길모퉁이를 돌던 차량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이때 재빨리 문을 열고 뛰어내린 B는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운전석의 P는 급속 공기 충전기를 가동했고, 상자에서 튀어나온 내게는 B의 중절모가 씌워졌다. 그제야 모퉁이를 돈 KGB 차량은 내가 탄 차량이 미 대사관으로 들어갈 때까지 뒤따라왔다. 그사이 B는 소련 국방부 소속 연구원인 H와 접선해 중요 군사 기밀을 넘겨받았다.


작전의 성공으로 스파이 인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덕분에 나는 바빠졌고, 나와 같은 인형들이 곳곳에서 활약했다. 개중에는 CIA 요원의 소련 망명을 돕는 경우도 있었는데, 체제 경쟁의 최전선으로 불려 나온 스파이 인형의 수는 감시 장비가 증가하면서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전격 폐기되었다. 소각장으로 가던 나를 빼돌린 건 역사학도 출신인 K였는데, 훗날 이 시대를 증언할 유물 하나쯤은 남겨놓자는 취지였다.


이후 사고로 죽은 K는 일찍이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도 없었기에 조카 K가 재산을 상속했다. 집 안에 꼭꼭 숨겨져 있던 나는 머잖아 발견되었고, 혈기왕성한 새 주인은 나를 전과 다른, 본래의 용도대로 쓰기 시작했다. K의 친구인 O가 허락도 없이 나를 빌려갔다가 분실하면서 나는 밀거래되고 대여되는 방식으로 사람들 사이를 떠돌았다. 그 과정에서 칠이 벗겨지고, 고무가 닳고, 충전기가 망가졌다.


돌돌 말린 채로 이곳 소각장으로 오는 동안, 그 옛날처럼 나를 빼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거대하고 은밀한 세계에서 소하고 은밀한 세계로 옮겨온 나는 더 이상 시대를 증언할 만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나와 같은 용도의 인형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결국 연기와 재로 흩어질 운명에 삼켜지고 마는 순간, 숱한 자국과 체취로 얼룩진 내 몸에서는, 거대하든 소하든 항상 은밀했던 삶을 떠들썩하게 증언이라도 하듯 타닥타닥 불똥튀어오르기 시작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