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Apr 05. 2021
그 저택엔 왕(같은 주인)이 살았다. 왕의 휘하에는 어린 아들과 배다른 동생인 운전기사와 젊은 가정부가 있었다. 일곱 살 먹은 아들 철에게 왕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고 겁났지만, 운전기사와 가정부는 말랑하고 만만했다. 철이 보기에, 차창에 먼지가 꼈다는 이유로 왕에게 악어가죽 혁대로 등짝을 얻어맞는 삼촌이랑 음식이 입에 안 맞거나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전임자들처럼 당장 잘릴 수 있는 가정부 누나는 자기보다 약자였다. 비록 저 자신도 이따금씩 문제의 혁대로 볼기짝을 맞고 다락방에 갇히곤 하는 신세였지만 말이다.
이런 철에게 뜻밖의 각성을 안겨주는 사건이 어느 날 벌어졌다. 한밤중에 깨어나 화장실을 다녀오던 철은 안방으로 다가갔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였다.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철이 보게 된 건 기묘한 광경이었다. 벌거벗은 채로 방바닥에 엎드린 왕. 왕의 목에 감긴 악어가죽 혁대를 고삐처럼 쥐고서 등 위에 올라탄 가정부. 그것도 분홍색 팬티만 걸친 상태로. 이상한 소리는 왕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로부터 뒷걸음질하면서 철은 깨달았다. 가정부가 왕보다 세다는 걸!
서열이 물구나무서는 충격 속에서 철의 관심을 잡아챈 건 분홍색 팬티였다. 그것만 있으면 혁대로 볼기짝을 맞거나 다락방에 갇히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철로 하여금 기회를 엿보게 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고, 가정부가 쓰는 방에서 바라던 물건을 훔쳐서 나오다가 주인에게 걸렸다. 철은 장물을 회수한 주인의 야릇한 웃음을 뒤통수로 느끼며 다락방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왕보다 센 사람에게 미움 받게 되었다는 두려움에 달달 떨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다락방으로 올라온 삼촌이 철을 깨웠다.
“아빠가 돌아가셨다.”
삼촌의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형사니 기자니 하는 사람들과 복상사니 심장마비니 하는 말들과 장례식이니 후견인 지정이니 하는 절차들이 어지러이 지나갔다. 그 와중에 경찰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가정부가 짐을 싸서 택시에 실었다. 그런 다음 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들은 대로라면 왕을 죽였는데도 멀쩡하게 풀려나온 강자의 위세에 납작 눌린 철은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가정부는 장물을 회수했을 때처럼 야릇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택시가 출발했다. 철은 멀어지는 택시를 눈으로 좇으면서 안도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처럼 두 감정이 줄다리기를 하는 가운데, 문득 뭔가를 보게 되었다. 차창 밖으로 나온 희고 가는 손가락. 깃대 같은 손가락 끝에서 펄럭이는 분홍색 팬티. 뜻밖의 도발에 감정의 줄이 툭 끊어지면서 철은 아랫도리를 흥건히 적셨다. 시원한 방뇨로 강자를 흘려보낸 철에겐 이제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손을 낚아챈 삼촌의 악력이 감전된 듯 저릿저릿한 감각을 안겨주기 전까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