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친구가 슬쩍 등을 툭툭 쓸어주자 펑펑 운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며 가끔씩 몰래 눈물 흘린 적이 있기는 해도 성인이 된 이후로 펑펑 운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이 그렇듯 어릴 때부터 세상살이가 정말 만만치 않고 팍팍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로는 한 인간을 넘어 아빠로서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종일 일을 하고 집에 와서도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잠들 때까지 보살피면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니지' 하며 지냈다. 아이들이 자라며 작은 아이는 러시아워를 뚫고 학원으로 나르고 큰 아이는 자정 넘어서까지 학원 근처에서 기다리다 픽업을 해 집에 데려오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집에 와서는 김밥 한 줄에 맥주 한 캔을 먹고 잠들었다.
이런 일들이 힘들기는 해도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언젠가는 좀 편안할 날이 있겠지 하며 살아갔다. 누구보다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고 함께 어울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우며 틈틈이 대학원 두 개를 다니고 모교에 출강까지 가게 되면서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어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한계가 왔다. 나보다는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내가 너무 바쁘니 챙겨주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어렵고 귀찮은 일을 할 사람이 사라져서였다. 그래서 과감하게 세 번째 대학원(박사과정)과 모교 출강을 포기했다. 그러면서 승진 준비를 시작했다. 대학으로 가지 못하고 학교에 남는다면 정년까지 근무가 쉽지 않다고 판단해서였다.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나이 많은 남자 초등교사를 싫어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니까.
그렇게 승진이 가까워질 무렵 몸에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기침이 시작되면 멈춰지지가 않았다. 처음 간 병원에서는 코로나 후유증이라고 했고 다른 곳에 가니 폐렴 증상이 있다고도 했다. 어렵게 찾아간 큰 병원에서는 섬유화증이 의심스럽다고까지 했다. 결국 여러 종합병원을 돌며 할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다 받았다. 폐 말고도 온몸에 염증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이 아파 누워 있으니 집이 엉망이 되어갔다. 쓰레기가 쌓여도 갔다 버릴 사람이 없었다. 아니 사실 있기는 했지만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았다. 힘들게 해 놓은 음식은 먹지 않고 배달 음식만 먹으려고 하니 식재료가 상해갔다. 문제는 더 이상 내가 힘든 일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몸이 아프기도 했으나 심리적으로 힘들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다 친구가 아무 말 없이 등을 쓸어 주니 울음이 터져 나왔던 것 같다.
내가 노력했으니 언젠가는 가족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것은 판타지였던 같다.
이제 나의 나약함을 인정한다.
더 이상 강인한 남자도, 아빠도 아니다.
그저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나약한 인간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