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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ㅅㅅㅇ Jan 13. 2022

시간은 같지만 다르다.

나와 너의 시간이 교차되는 지점은 나와 네가 마주하는 그 순간이다.

오늘도 걷는다. 

집에서 싸온 토마토를 먹고는 산책을 나갔다. 


테헤란로의 점심은 활기차다. 

1시간 남짓의 점심시간이 직장인들에게 무언가 해방감을 주어서일까?

누군가에게는 점심식사를 해야 하는 의무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불편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추운 그늘과 바람을 피해 따뜻한 햇살 가득한 거리로 향했다. 

오늘도 적어도 40~50분가량을 걸으며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걸으며 걸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저 걸을 뿐이다. 


그러다 가보고 싶은 곳이 떠올랐다. 

'최인아 책방'이다. 


책방 같지 않은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지나가면서 언듯 보면 전혀 책방 같지 않다. 

그러나 들어서면 도심의 빌딩 숲과는 다른 책으로 둘러싸인 책 숲이 펼쳐진다. 

책들 사이를 걸었고, 그곳의 정취와 문화를 읽고자 애썼다.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었다. 

선별된 책을 추천하고, 함께 그 책을 읽고, 그 책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와 네가 함께 소통하는 곳이었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최인아 책방의 알고리즘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책방 주인의 세계관일 테고, 그 책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유한 생각의 교집합일 것이다.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책을 구매하고, 커피와 함께 책 산책하러 방문해야겠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걸었다. 


'이 거리에서 누군가를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여기에서부터 중얼중얼 생각을 끄집어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만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여기서 같은 시간은 객관적인 시간이다. 다른 시간은 주관적인 시간이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일까?

사실 절대적일 수 없다. 시차는 공간에 따라, 중력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산책을 하며 걷는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지나갔다. 그저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를 위해 멈추어 서지 않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도 않는다. 

혹시라도 멈추어 서는 경우는 다가오는 사람이 내가 가는 길을 막고 있거나 핸드폰을 보느라 피하지 못했을 경우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내가 아는 누군가를 저 멀리에서 발견했다면, 주저 없이 손을 흔들거나, 전화를 걸거나, 그쪽으로 걷거나 뛰어갈 것이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이는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에게 오늘 반대되는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시간은 같지만 같지 않다. 사실 같아질 수 없다. 적어도 교차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 교차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서로의 시간이 교차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누군가와 시간이 교차되기 위해서는 마주해야 한다. 

의지적으로 때론 자연스레 마주해야 한다. 


시간이 교차되는 것을 우리는 우연이라고도 하고, 운명이라고도 한다. 

우연과 운명 사이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나다.


그래서 나와 너의 시간이 교차되는 것은 나와 네가 마주하는 그 순간이다. 

여기에서 너는 대상이 아닌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의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래서 온 존재로 마주하는 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떤 너와 마주했는가?

중얼중얼 이야기하며 마주한 너는 누구였는가?


그 너는 바로 나였다.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나,

우연이든, 운명이든 시간이 교차되기를 기대하는 나,

최인아 책방에서 부러움에 설레던 나,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는 나다. 


산책하며 더 느낀다. 

나는 나와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 나의 시간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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