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날벌레> 2회
"잘했어. 10분만 쉬다 가자."
배구 선수 출신으로 180센티미터의 장신인 매니저 명주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우를 잡고 밴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명주는 배우가 데뷔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오래된 사이였다.
명주는 배우보다 6살이 많았고, 배우는 누구나 한결같이 대하는 그녀를 언니같이 믿고 따랐다.
현재 명주는 배우만을 관리하는 1인 매니지먼트 회사를 설립한 대표이기도 했다. 배우가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명주의 과감한 추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필요한 말과 행동만 하는 명주는 배우가 쉬는 동안에도 꾸준히 입지를 넓혀 업계에서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주가 차에서 내려 주차장 외곽의 흡연 구역으로 가는 모습을 차창 너머로 지켜보던 배우는 그제야 꽉 끼인 구두를 벗었다.
얼마 전 페디큐어 받은 엄지발톱이 살짝 찢겨 발가락 살에 파고들어 있었다. 상처는 대부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부터 더 아프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명주가 세심하게 준비해 놓은 구급함 속에서 밴드를 꺼내 엄지발가락 위에 감으며 생각했다.
그게……. 뭐였을까.
그녀는 주차장까지 오는 내내 그것에 관한 생각으로 오늘의 목적을 잠시 잊었다.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새벽까지 잠을 뒤척였었다. 눈을 감으면 심장이 쿵쾅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인터넷은 물론 TV나 유튜브 영상을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오랜 기간 영양제와 극소량의 음식, 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제는 정체도 알 수 없는 날벌레 한 마리가 자신을 위로했다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배우는 중학생 때 우연히 친구와 함께 보던 잡지 속 교복 모델 콘테스트에 응모해 3등으로 선발되었고, 한 신생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소속되어 아이돌 연습생으로 지내며 춤과 노래, 연기를 배우게 되었다. 시작은 운 좋게 그녀에게 유리한 방향대로 흘러갔다.
주말 드라마 ‘비혈연 모녀’에서 친근하고 귀여운 이웃 소녀이면서도 어른스러운 딸 '리나' 역할에 적합한 외모라는 이유로 곧바로 캐스팅되었고, 똑 부러지고 책임감 강한 장녀 캐릭터 덕분에 중장년층에 특히 많은 인기를 얻으며 활동 기간 내내 본명 대신 '리나'라는 배역 명으로 불렸다.
이제 30대에 접어들었지만, 배우의 대표작은 여전히 '비혈연 모녀'에 머물러 있었다.
평생 대표작이 없는 무명 배우들도 많다는 주변의 위로 따위,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배우는 더 필사적으로 여러 배역 오디션에 도전했다. '리나'였기에 가능한 시도들이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리나를 지울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성장할수록 길어진 턱과 툭 불거진 광대는 '리나'의 이미지에서 점점 벗어났고, 매력 포인트로 여겨지던 덧니 역시 변화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소속사의 제안으로 치아 교정 치료를 시작한 덕분에 한동안 트레이드마크인 천진하고 환한 미소도 지을 수 없었다. 또렷했던 발음과 목소리마저 흐릿해졌다.
곧 인성마저 변한 외모처럼 비뚤어졌다는 근거 없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배우는 점점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자신 없게 움츠러들었다.
급기야 그녀의 연기력이 '리나'라는 캐릭터에 가려져 과대평가되었다는 어느 네티즌의 평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대표작인 '비혈연 모녀'의 주요 장면을 악의적으로 짧게 편집하여 비난하거나 깎아내리는 영상들이 속속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온 국민을 울렸던 소녀의 순수한 눈물 연기는 순식간에 악마의 눈물로 재편집되었다.
이후, 연기력을 증명하기 위해 도전한 첫 연극무대에서 그녀는 카메라 밖에 있던 수많은 눈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배우는 전기에 감전된 듯한 강한 발작을 일으키며 한 마디 대사도 내뱉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한동안 그 장면은 영상과 기사로 파생되면서 사람들의 흥밋거리가 되었고,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되기까지 하였으나 또 다른 유명 배우의 열애 스캔들이 공식화되면서 배우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지금은 한낱 날벌레 따위나 생각하며 위안할 때가 아니었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밀려나는 업계의 섭리는 이미 경험으로 학습되어 있었다. 배우의 호흡이 다시 불안정해졌다. 그녀는 온몸에 딱 달라붙어 공기조차 통하지 않는 갑갑한 허물부터 당장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벗을 수가 없었다. 촬영을 위해 네일아트 받은 날카로운 손톱 때문에, 옷에 흠집이라도 나면 문제가 커진다. 그녀는 아직 수익이 없었고, 수익을 확신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배우는 선반에 있던 휴대용 선풍기를 가져와 겨우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이런 옷이라도 협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해야만 했다. 보기에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잊힌 그녀를 단번에 각인시키기에는 적당한 옷이었다. 도착한 옷을 당혹스럽게 살펴보던 배우를 향해 명주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다.
"걱정하지 마. 이게 네 날개가 될 테니까."
사실 이 옷은 처음부터 배우에게 맞지 않았다.
신축성이 거의 없는 소재로 만들어져 발목도 겨우 집어넣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원단의 특성상 속에는 속옷조차 입을 수 없었고, 특정 부위에만 얇은 천이 겨우 덧대어져 있어서 더 적나라한 느낌이었다. 이 볼썽사나운 옷을 위해 누가 봐도 마른 몸을 더 마르게 만들어야만 했다.
옷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이 옷에 맞출 누군가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괜찮지?"
운전석으로 돌아온 명주가 배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괜찮은지 아닌지, 괜찮을 것인지 아닐 것인지, 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배우는 겨우 숨을 고르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차 안의 옅은 조명은 명주의 깔끔한 성격처럼 먼지 조각 하나 없이 정돈된 바닥 위에 무방비하게 벗어둔 구두만 무심히 비추고 있었다.
조금 전 온통 자신만을 비추던 자비 없는 불빛들이 떠올랐다.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그것의 모습도.
다시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백미러 너머로 배우를 살피던 명주는 익숙한 듯 차 안에 있던 작은 보온병 컵에 물을 담아 알약과 함께 건네주었다.
이 약이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게 해 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