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니쓰니 Jun 05. 2017

너는 피곤했지만 밤 10시까지 있었다.

ep4.

 

그리지_쓰니랑



마법에 걸린다는 것. 한 달 중 하루 정도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고통을 느끼고 이틀 정도는 벗어날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며 2~3일 정도는 찝찝꿉꿉 우울함의 증상을 느끼는 것. 이런 증상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나는 그렇다.


그렇다고 마법 기간에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기엔 너무 많은 날을 허비하게 되어 버리니까. 난 몇 년 전부터 진통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약이란 참으로 신비롭게도 먹고 나면 정말 아프지 않게 해준다. 그렇게 매달 매달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 기간에 무엇인가를 한다는 건 평상시 컨디션이 좋을 때보다는 조금은 힘든 일이다. 특히 몸이 가장 신호를 강하게 보내는 첫날에.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다”


“오 이건 랍스타네. 랍스타도 팔아”


“우와 진짜 먹을 거 많다”



여의도 야시장을 즐긴다는 것. 그냥 5월의 어느 날 강바람을 맞으며 미세먼지를 마시며 먹고 먹고 또 먹는다는 것. 계획에 없던 여의도 야시장을 마법에 걸린 날, 그 중에서도 특별히 더 힘든 날 간다는 것.


몸이 힘들긴 했지만 진통제도 먹었고 야시장을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빵빵 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어떤 푸드 트럭이 있나 구경도 하고 야시장 오픈 시간인 6시가 되자 어디선가 몰리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미세먼지는 심각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선선한 바람에 기분 좋게 돌아다녔다.


단돈 6000원에 먹을 수 있는 막창에, 생크림 가득 바나나 가득 누텔라 가득 달콤함이 가득가득한 크레페, 달콤쌉싸름한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시원한 모히또, 치즈가 가득하다못해 아주 치즈에 담겨있는 주객이 전도된 으깬 감자까지 참 맛있는 야시장이었다.


너무 맛있고 정말 재밌고 신났지만 몸 상태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난 마법에 걸린 여자니까.


같이 있으면서 지친 모습으로 있는 게 괜히 미안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씩씩한 척하기에도 피곤했다. 요즘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도 한몫했다. 이런 저질스러운 체력 상황에서 마법까지 겹치니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다.



“나 오늘 마법에 걸린 날이라 피곤한 거야, 그래서 상태도 더 안 좋아 보이는 거야 알지?”



헤어지기 전에 지쳐 보이는 나를 걱정하는 그에게 말했다. 사실 오늘따라 뚱하게 나온 사진들도 맘에 들지 않았다. 거울로 봐도 내 얼굴은 정말 뚱했다. 부어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카톡’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 만나고 헤어지는 길에 우리는 서로가 찍은 사진을 서로에게 보냈다. 이 날도 그는 오늘 찍은 우리 사진을 묶어서 카카오톡으로 보내왔다. 카톡을 확인한 나는 온 얼굴에 퍼지는 웃음을 느꼈다.


여의도 야시장에서 돌계단에 앉아 같은 모히또에 각각 빨대를 꼽아 쪽쪽 빨아먹고 있는 모습, 귀엽게 담겨 있는 막창, 크레페를 사서 나에게 걸어오는 그를 찍고 있는 내 모습 등 실제보다 사진에 담긴 모습이 더 즐거워 보이는 그런 이상하지만 이해되는 사진들. 하지만 내가 웃음이 나왔던 이유는 이 사진들을 묶은 메시지였다.

 


‘너는 피곤했지만 밤 10시까지 있었다.’



웃기게도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정말 피곤했는데 밤 10시까지나 놀았다. 몸이 힘들어 죽겠다고 그렇게 신호를 보내는데도 난 밤 10시까지 여의도에서 야시장을 신나게 즐겼다. 어디서 나온 엔도르핀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날 난 정말 너무 피곤했지만 밤 10시까지 있었다. 네 말이 맞다.



이전 03화 이불 밖은 위험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