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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쓰니 Jun 13. 2017

"어떻게 웃어. 내가 웃었으면 다 따라 웃었을 텐데"

ep6.

그리지_쓰니랑




난 넘어졌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예쁘게 연분홍빛 원피스를 입고 한 손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가득한 커피 잔을 들고서 철퍼덕 넘어졌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절대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 물결이 쳤던 4월의 여의도 윤중로에서 난 예쁘게 입고 새침하게 걷다가 철퍼덕 넘어졌다.



2017년 봄은 유독 자외선이 강했으며, 뜨거웠고, 살갗에 햇빛이 닿는 느낌이 드는 그런 햇살이 비추는 그런 시기였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이 노래가 나오는 거 보니 봄 맞다. 언제부터였을까 봄이 올 때마다 언제 어디서나 흘러나오는 노래. 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입에서 흥얼거리는 노래. 장범준의 벚꽃엔딩.



“오늘 평일 맞니. 사람 왜 이렇게 많니. 주말이니”


“그러게 진짜 사람 엄청 많다. 아마 주말에는 이것보다 더 많겠지?”



사람 없는 날, 평일 낮, 직장인들은 나올 수 없는 시간. 요즘 백수가 된 나는 참으로 자유로웠다. 백수의 가장 큰 장점. 사람이 엄청 미어터지는 시간을 피해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


그런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너무 많았다. 벚꽃을 구경하려고 하는 사람 물결이 인도 양쪽으로 가득했다. 끽하다가 도로로 밀려나갈 것만 같았다. 이 물결 속에서도 우리는 벚꽃 산책을 즐기기 위해 길거리 트럭에서 파는 아메리카노 한잔씩을 각각 손에 들고 서로의 손을 잡고 걸었다.


햇빛이 살짝 심하게 정말 매우 눈이 부시게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 헷갈릴 만큼 따사로웠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 물결 속에 한 사람으로 길을 걸어야 했지만 고개만 살짝 들면 분홍빛 솜사탕처럼 이보다 더 풍성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자태를 뽐내는 벚꽃이 가득했다.


예뻤다. 벚꽃은 1년 중 딱 1주일만 필 수 있는 꽃이라 그런지 세상 예쁘게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만 같다.


‘어?’


우리는 길을 건너가려고 했다. 단순하게 길을 건너려고 했다. 그때였다. 난 넘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순간 내가 갖고 있는 미친 운동신경을 발휘하며 멋지게 쓰러질 수도 없었다. 한 손엔 아메리카노를, 다른 한 손은 그의 손을 잡고 있었으니까.


난 넘어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발목을 삐끗하면서. 사람 물결이 치고 있는 벚꽃이 가득 핀 4월의 윤중로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물결 속에서 살짝 빠져나온 그때.


난 넘어졌다. 봄나들이에 걸맞게 새로 장만한 예쁜 연분홍빛 원피스를 입고 오른손에는 아메리카노가 가득한 컵을 들고서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치마를 크게 펄럭이면서.


난 넘어졌다. 양손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오른쪽 팔꿈치와 양 무릎을 그대로 땅에 내다 꽂았다.



“어머 어째”, “어떻게 해”, “진짜 아프겠다”


‘웅성웅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귀가 쫑긋 확 열렸다. 모든 사람들의 소리가 내 귀로 쏙쏙 들어왔다. 넘어지면서 단 한순간도 눈길을 뒤로 돌린 적은 없었지만 길을 건너려고 밑으로 내려가다가 도로에서 넘어진 거라 그곳에 있던 벚꽃을 즐기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다 아주 잘 쳐다보고 있는 그런 상황임이 분명했다.


넘어졌을 때 정말 너무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너무 아팠는데 이 아픔보다 더 큰 감정이 몰려왔다. 너무 창.피.했.다. 나의 이런 창피함을 더 가중시킨 건 내가 들고 있던 커피였다. 그대로 땅에 내다 꽂아서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내 커피. 철퍼덕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커피를 사수했다. 본능적으로.


온몸에 붉은 기운이 확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파서인지 창피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창피함이 너무 커서 아픔을 견딜 수 있었다.


그때 그의 상황 대처능력이 발휘됐다. 넘어짐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내가 넘어지기 시작한 순간 잡고 있던 내 손을 힘줘서 더 큰 불상사를 막았다. 내가 넘어짐과 동시에 그는 펄럭이는 치마를 빠르게 잘 잡아주고 나를 바로 일으켰다.



“나 너무 아픈데 너무 창피해...”


내 말을 들은 그는 자연스럽게 내 얼굴을 가려주며 바로 길을 건넜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땅에 그대로 내리꽂았던 양쪽 무릎과 오른쪽 팔꿈치의 시큰거림이 채 가시기 전에 우리는 도로 횡단보도를 건너 작은 공원에 놓여있는 벤치에 앉았다.


나의 못볼꼴을 목격하신 사람들에게서 멀어지자 아픔이 신경 쓰였다. 신기하게도 찢어지지는 않은 스타킹 밑에서 파란빛인지 초록빛인지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무릎 상태가 두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팔꿈치가 문제였다. 직접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맺힌 상처를 확인했고, 다쳤다는 게 인식되자 시큰거림이 욱신거림으로 더 아픔이 가중되는 그런 신비로운 상황이 시작됐다.


그러다 아까 넘어졌던 순간에 내 모습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진짜 완전 웃기게 넘어졌는데... 뒤에서 들리는 안타까워해주는 목소리 사이에서 ‘풋’ ‘헉’ 이런 효과음을 무시한 게 꿈은 아니겠지...



쓱 팅 퉁. 탁구공이 내 머릿속 양쪽을 탕탕 치면서 왔다 갔다 하듯이 이런저런 생각이 파팍 지나쳐갔다. 그러던 중 얼마나 웃겼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팔꿈치 상처를 확인하며 어쩌냐며 너무 아프겠다고 걱정해주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상황은 이상하지만 난 갑자기 가슴 밑에서부터 뭔가 확 올라오는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진짜 웃겼을 텐데 그는 웃지 않았다. 잘 참은 건가. 그래도 고맙다. 나는 웃음은 절대 못 참는 st라. 웃었어도 이해했을 거다. 근데 그는 웃음이 흘러나오는 티도 안 냈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툭 내뱉었다.



“웃지 않아줘서 감동했어”


“뭘 웃지 않아?”



멍든 내 무릎을 어루만지던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내 생각에 나 넘어질 때 너무 웃겼는데 어떻게 안 웃었어?”


내 말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어떻게 웃어. 내가 웃었으면 다 따라 웃었을 텐데”



그의 말에 한동안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마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난 그냥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그 감정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나를 위해준 그에게 너무 고마웠다. 이 감정이 맞는 거 같다.

.

.

.

.

.

그 당시에는 그의 상황 대처능력을 평가할 수 없었다. 내 스스로가 나하나 챙기기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계속 생각해보고 다시 생각해보고 또다시 돌이켜 생각해봐도 이날 그의 상황 대처능력은 탁월했다. 고마워.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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