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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Dec 18. 2024

[노파에세이] 이문열, <사람의 아들>

플롯의 난점과 압도적인 진지함


<사람의 아들>은 이문열 작가가 스물다섯에 군대 가기 직전에 쓴 소설이다. 한 문예지에 문학상 응모작으로 보내고 군대에 갔으나 나중에 확인해보니 예심에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원고를 안 버리고 있다가 몇 년 후 원고 청탁이 들어왔을 때 다시 원고를 다듬어서 냈더니 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작가상 응모작으로 돌려 수상작으로 뽑았다. 


그때 원고를 심사한 위원이 그 유명한 김우창과 최인훈이다. 당대의 지성들은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주제 추구의 단단함과 그 처리에 보여주는 진지함의 무게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플롯상의 난점을 보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고전적인 품위를 성취해 놓고 있다. 이문열 씨의 <사람의 아들>을 수상작품으로 결정하면서 우리는 진지함이 그리 흔치 않은 문학적 품성임을 상기하였다.”


실제로 이 작품은 진지함으로 주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 힘이 압도적이다. 어떤 주제를 그렇게 압도적인 힘으로 파헤쳤냐면 바로 기독교와 유대의 신, 야훼다. 이 소설은 무려 하나님의 기원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2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보았다. 그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에 관한 이야기에 이토록 열광한다는 사실이. 


*

소설은 한 형사가 민요섭이라는 남자의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동안 피해자의 노트에서 발견한 ‘아하스 페르츠’에 관한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한때 신실한 신학생이었던 민요섭은 예수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 ‘아하스 페르츠’에 관해 알게 되면서 기독교를 다시 낮은 자들을 위한 종교로 만들기 위한 나름의 활동을 펼치다가 살해당한다. 


소설의 큰 줄기는 이렇게 민요섭을 살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이야기지만, 실제 내용은 아하스 페르츠가 야훼를 찾는 여정에서 알게 된 깨달음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 깨달음이란, 야훼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는 오직 신의 말씀만 받든 채 “육신을 가진 인간의 비참과 불행”은 외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굉장히 파격적인 내용인데, 아마도 그 시절엔 기독교가 지금처럼 강세를 떨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

이문열 작가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상상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 가나안 지방, 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지역의 초기 신화를 집요하게 훑어내며 두터운 층위의 근거를 제시한다.


‘플롯의 난점’은 여기서 나온다. 무수한 신의 이름과 비슷비슷한 신화의 내용이 본문의 분량을 넘어서는 각주를 달고 몇 페이지에 걸쳐 나와 긴장감이 급격히 떨어지고 지루해진다.


결정적으로, 이토록 성실하게 아하스 페르츠의 발자취를 좇던 민요섭이 왜 갑자기 기존 기독교의 질서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것은 민요섭이 살해를 당하는 직접적인 이유이므로 자세히 해명될 필요가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아들>


*

또한 아하스 페르츠가 자기 논리의 근거를 두텁게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 밀도가 치밀한 것은 아니다. 


불교에 관한 이야기도 짧게 나오는데, 브라만과 아트만을 하나로 보는 종교라고 설명한 점(이것은 힌두교에 관한 설명이다)이, 그리고 해탈을 ‘가장 큰 욕구’라고 설명한 점(이것은 모든 욕구가 버려진 후의 상태를 말하는 단어다. 욕구가 아니라 방향이다)이 작가가 각각의 종교를 깊이 있게 연구하진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기독교를 오래 믿고 공부한 사람이 본다면 엉성한 부분이 훨씬 많을 것이다. 


*

여성에 대한 시선도 지독하게 가부장이다. 등장하는 여성들은 전부 창녀 아니면 성녀이고, 창녀든 성녀든 모두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을 정신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죽는다. 


이들은 왜 여자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스스로 성장할 수 없는 것인가?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는 ‘위대함’을 ‘위대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질문은 무척 좋았다. 


“왜 인간은 슬퍼하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박해당해야만 참으로 복 있는 자가 될 수 있는가요?” 


유대 랍비의 아들로 태어나 본인도 랍비의 길을 걸을 운명이었던 젊은 아하스 페르츠는 이 질문에 막혀 도저히 자신의 운명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수 없었다. 거기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

스스로의 재능을 확신하는 이가, 젊음의 호기까지 얹어지지 않으면 결코 쓰기 어려운 주제와 내용을 아주 솜씨 좋게 엮어낸 소설이다. 


그 자신만만한 젊은이는 이제 문단의 원로가 되어 여전히 질문을 품게 하는 말들을 사방으로 쏘아대고 있다. 


최근에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한다면서도, “작품도 읽어본 게 별로 없지만” “노벨상이라는 껍데기에 시야가 가려 그쪽(한강의 묘사적 소설)으로만 가버리면 망하는 거고”와 같은 말을 스스럼없이 쓴 것을 보며 역시..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소설은 재밌다. 역시.

ps. 

이 책을 읽고, 아버지와 형님이 목사인 지인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이 책을 어떻게 보는지,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라는 이야기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집요하게 물은 날,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나눈,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고 먹고 사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더욱 소중한 대화가 됐을 것이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696284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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