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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Dec 20. 2024

딸을 존경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노파에세이] 한강 작가와 한승원 소설가


25년 전 한강 작가가 프레젠터로 나온 EBS 다큐멘터리 <여수의사랑>을 보았다.


20대의 그의 모습을 무려 한 시간 동안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방송을 틀었으나… 앳된 얼굴은 방송 초반 제작진과 인사할 때 잠시뿐,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이 한시간 내내 이어졌다.


어느 장소, 어느 시간대에 찍어도 그의 얼굴은 똑같았다.  세상의 잔인함과 고단함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얼굴. 청춘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만큼 지쳐버린 얼굴.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연민을 놓을 수 없는 얼굴. 


그는 아마 노인의 영혼을 지닌 채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마저도 좋았다.


*

다른 다큐멘터리에서는 아버지 한승원 작가의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전에 한강 작가의 못생긴 손편지를 거울 옆에 붙여놓은 사진에서도 느꼈는데, 이번 인터뷰에서 확실히 알았다. 그는 자신의 딸을 존경한다.



그 자신도 뛰어난 소설가이면서 그는 딸의 감수성과 예민함, 그것이 만드는 모든 표현과 서사를 아끼고 경외하고 있었다.


그게 무척 낯설었다. 아들을 존경하는 엄마는 숱하게 봤어도 딸을 존경하는 아버지는, 마치 함께 사용되어선 안 되는 단어가 결합된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진다.


나는 딸을 존경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할 수 있는 그 얼굴을 오래도록 봤다.


*

얼마 전에 만난 작가님은 저토록 우아하고 품위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작가가 무척이나 부럽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읽는 아버지, 글을 쓰는 아버지, 그래서 험한 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아버지.


가난하고 험한 유년 시절을 보낸 우리는 단순히 작가의 기름진 문학적 토대로서 그의 아버지를 부러워한 것이 아니었다.


돈보다 책이 중요하고,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높이 여기고, 아름다움의 드높은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지닌, 그 모든 것이 언어의 형태로 배양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그가 부러웠다.


욕설과 고성이 오가지 않고, 머리 위로 물건이 날아다니지 않는, 당장 나가게 빨리 옷 입으라는 밤이 없는 그런 환경. 니까짓 게 뭘 하느냐고 의심하고, 빈정대고, 깎아내리지 않는 그런 환경에서 자란 그가 부러웠던 것이다.


*

대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언어가 친구들의 언어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개새끼들 기관총으로 다 쏴죽이고 싶네”라는 말은 보통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써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라는 것을, 그래서 스무살 푸른 봄 같은 나이의 여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심지어 그때 나는 그리 화가 난 상태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말들이 수시로 오가는 환경에 있다보니 강가에서 조약돌 집어들 듯 어렵지 않게 그런 언어들을 몸속으로 밀어 넣었을 뿐이다.


그리곤 힘들 때 짜증 날 때 시시때때로 그런 말들을 꺼내어 썼다. 나에게 그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

문학을 배우고 책을 읽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쓰는 사이 나는 꽤나 영애가 되었다. 


특히 글쓰기의 힘이 컸다. 그런 단어와 생각을 지면 위에 옮겨 적는 순간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추한 것, 거친 것을 멀리하고 보다 순하고 정제된 말을 쓰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날 때부터 그런 환경 속에 있던 사람의 말의 아름다움은 감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나는 애를 써야 나오는 말이 그에겐 당연한 생활의 언어였으니깐.


그래서 언어가 아름다운 사람의 글을 볼 때마다 그런 말들을 정신의 피부처럼 덧씌워준 그의 부모가 궁금해진다. 그리곤 역시.. 하게 된다.



*

요즘은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를 다시 읽는 중이다. 아름다운 말들이 곳곳에서 시선을 잡아 끄는 바람에 좀처럼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아름다운 말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이, 이제는 아버지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빚어낸 말을 탐닉하다보면 내게도 그런 아름다움이 영혼 깊숙이 스밀 것 같다.


이제 내 거친 영혼은 한강 작가님께 맡겨야겠다.

작가님, 사람 좀 만들어 주십쇼.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697665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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