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파서평] 문제적 소설, 표백

by NOPA




<표백>은 장강명 작가의 등단작이다. 처음 집필한 소설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으니 화려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심사위원의 평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자 출신 소설가들이 그렇듯 장강명의 문장은 명확하고 간결하다. 그다지 스펙터클한 줄거리가 아님에도 <표백>이 제비처럼 날렵한 까닭은 그 덕분이다.” - 조두진


문장은 아름답지 않고 줄거리는 스펙터클하지 않다는 에두른 혹평이 조금 잔인하게 여겨져 찾아보니, 조두진이라는 소설가 역시 기자 출신이다. 같은 업종이라 더 엄격하게 본 걸까? 그러나 다음 평은 더 하다.


“이 소설은 맹독을 지녔다. 몇 년 사이에 읽은 소설 중 가장 문제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소설이 가진 거친 야전성은 당혹감과 불안한 매혹을 함께 내장한 피스톨을 우리에게 겨눈다. 싸늘히 표백된 우리 시대 청춘들의 잔인한 자화상. 이 아픈 유령들에 대해 독자들 사이에도 극명한 호오好惡가 생길 것이다.” - 김선우


이것은 확실한 오惡의 선언이다. 문학상 수상작을 읽으면 심사위원의 평을 반드시 챙겨보는 나로서는 이렇게 선명한 불호의 평은 처음 봤다. 모두가 믿고 본다는 신형철 평론가의 평도 핵심은 마지막 한 문장에 있었다.


“논쟁적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등장이 반갑다.” - 신형철


어떤 점이 그렇게 논쟁적이었을까? 취직도 어렵고, 계급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도 어려운 지금 시대에 청년들의 사회 저항 수단으로 제시한 것이 “자살”이라는 점이 논쟁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살을 추동하고 끝내는 자기 자신도 자살로 삶을 마감한 인물이 우리 대학 퀸카, 세연이라는 점이 내겐 가장 논쟁적이었다.


*

“또 죽였네.

이쯤 되면 90년대 명문대 학부를 나온 남자 소설가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범한 퀸카를 엄청난 요부로 둔갑시켜 자살시키는 이야기. 하루키 소설을 보고 김영하 소설을 읽으며 이거닷! 라고 생각해 예쁜 여자들을 질펀하게 굴린 후에 결국 스스로 죽게 만드는 잔인한 남자 작가들의 이야기. 그들은 대학교 엠티 때 구석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을 때부터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매력적인 퀸카를 죽이고 싶었던 걸까? 나의 날카로운 지성으로 너희 예쁘고 걸레 같은 것들을 합리적으로 자살시키겠어, 식의 병든 자의식.”


이것은 서평을 쓰려고 핸드폰 메모장을 정리하던 중에 발견한 것으로 아마도 나의 12번째 자아가 쓴 것 같다.


그는 예쁜 여자들을 자살시키는 남성 작가들의 서사에 유독 진저리를 치는데, 그런 이유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후 김영하의 소설은 더 읽은 적이 없다.


아마도 장강명의 소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명문대를 나온 40대 남성 작가가 소설 속 모든 자살 사건을 기획한 인물로 예쁘고, 똑똑하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20대 여자 대학생으로 설정한 데서 그 계보를 보았기 때문이다.


*

세연은 “남자들로부터 공짜 선물을 받는 데 익숙했고, 자기에게 빠진 남자들을 착취하는데도 능숙”하다고 정확하게 평가받는 반면, 주인공인 ‘나’는 여자친구 오피스텔에 더부살이하며 거처와 잠자리를 착취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평가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막막한 취업 준비에 심신이 지친, 가난하고 불쌍한 보통의 20대 청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 보통의 20대 남자인 ‘나’는 여자친구 ‘추’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착취를 정당화한다.


“바보, 천치인 추가 있고 창녀인 추가 있었다. 나는 바보 추를 혐오했고, 창녀 추는 혐오하면서 거부하지 못했다.”


추가 자살을 한 것을 알게 된 후 ‘나’가 말하는 내용은 더욱 문제적이다.


“추에 대한 나의 욕망은 상대를 죽어라 두들겨 팬 뒤 강간하고 싶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 정말로 내가 그녀를 두들겨 패고 강간했더라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르거나 저지르지 않은 어떤 죄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속죄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폭행과 강간에 대한 자신의 병든 욕망이 오히려 상대를 구원할 거라고 믿는 인물의 생각을 옮겨쓰면서 작가는 아무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했던 걸까? ‘나’를 통해 보통의 20대 남자를 그리려 했으면서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문제적으로 여겨졌다.


*

그럼에도 이 소설이 당선작이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심사평대로 문체는 매력적이지 않지만, 구성이 화려하고 사상이 흥미롭다.


자살 선언의 정당성을 다양한 논리와 주장을 통해 펼쳐나가는 전형적인 사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여러 유명한 작가와 사상가들의 말과 글을 인용하여 읽을거리가 풍성하고, 세연의 소설을 현실의 이야기와 교차 구성하여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돈 없는 고시생들의 삶, 공무원들의 전전긍긍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어 내 주변 누군가의 삶을 보는 듯한 재미도 탁월하다


*

다만 지금 청년들이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라서,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아서 “단 몇 명의 죽음으로도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자살을 한다, 라는 핵심 메시지가 설득력이 약하다.


아마도 위대한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은 명문대를 나와 3대 일간지 기자로 취직했으나 기대만큼 어떤 인물도 되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 작가 본인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내가 만난 많은 청년들은 영웅이나 위대한 사람이 되는 일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돈 욕심이 많은 친구들은 CPA든 펀드매니저든 이미 착착착 준비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었고, 말인즉, 사회는 그들의 전진을 용인할 만큼 유연성은 갖추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지 않은 “진짜 보통”의 친구들은 고양이 밥 안 굶기고, 겨울에 보일러 빵빵하게 틀면서 주말마다 치킨 먹고 넷플릭스 보는 일상이면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보통의 청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위대해지고 싶다고, 5년 전에 죽은 여자의 말을 따라 엄마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과시적으로 목을 매어 자살할 것 같지는 않다.


*

그런 점에서 내게 이 소설의 문제는 자살 자체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사회도 문제지만, 진짜 병증은, 자신은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집착하는 인물들에게 있지 않을까? 대체 위대한 영웅이 안 되면 안 될 이유가 뭔가.


그리고 자살을 과시적으로 한다고 그 사람이 위대해지는가, 하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위대해지고 싶으면 남태령에서 시위를 하고 매일 집회에 나가 내란 수괴를 몰아내는데 일조를 해라.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가 이명박때부터 위대해질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았나? 전두환이 자연사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원하는대로 과시적 영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인물들이 위대해지기 위해 택한 방법이 고작 자살이라는게, 그게 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연이라는 인물 자체의 설득력도 너무 약하다. 세연의 미모와 언변이 아무리 현란하더라도 누가 20대 때 만난 대학 퀸카 때문에 삼십줄 들어 자살을 하겠는가?


차라리 50대 화류계 여성이 정치권 남자를 유혹해 계엄을 터뜨리게 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겠다.


*

그만 써야겠다. 연말까지 할머니 애도 기간인데, 서평이 너무 독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을 보면, 정말 흥미로운 소설임에는 틀림 없다.


직접 보시고 자신의 호오를 판단하시기를!

이야기 자체는 무척 재밌습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707267052

#노파의글쓰기 #어느날글쓰기가쉬워졌다 #글쓰기 #글잘쓰는법 #노파 #김수지작가 #에세이 #문해력 #어휘력 #북스타그램 #책리뷰 #서평 #감성글 #표백 #장강명 #한겨레문학상 #나는나를파괴할권리가있다 #김영하 #윤석열탄핵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4화사소한 승리와 이상한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