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첫째날 아침 9시.
버스 안은 고요했고, 버스기사가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 뾰로통해졌으나 뒷사람 인사도 받아주지 않아 그의 공평한 무례함에 기분이 풀어졌다.
손수레에 사과 한 박스를 싣고 탄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오늘이 설날인지 모를 정도로 평일과 다를 바 없는 버스 안 풍경이다.
할머니는 올라타면서부터 연신 미안하다고 했고, 그 말에 무례한 버스기사도 군말없이 출발을 늦췄고, 버스 앞쪽에 앉아 있던 노년 여성도 자리를 양보해줬으며 이번엔 연신 고맙다고 하는 할머니를 보며 누구도 민폐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생각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고작 두 마디 말이 지닌 힘은 얼마나 강력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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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대곡을 지나도록 자리가 널럴했고, 승객은 노인 반 청년 반의 비율이었는데, 청년들은 엄마 집에 가는 것 같았고, 노인들은 어딜 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설 첫째날 아침 9시부터 지하철을 타고 나서는 노인들은 어딜 향하는 걸까? 차례를 아들네서 지내는 건가?
내가 노인이 되면 알 일이다.
그럼 사람들은 나를 보고 설 아침부터 어딜 간다고 생각할까? 손에는 사과 박스도 없고, 차림은 명절을 쇠러 간다기 보단 복장 규정이 느슨한 회사에 출근하는 것 같은데…
나는 차를 마시러 가는 길이다.
손바닥에 ‘왕‘자를 새긴 인간이 점쟁이가 죽는다고 하는 바람에 나랏돈 수천억을 들여 이사를 하여 비어버린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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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걸 보면 수천억 들여 이사한 효과가 있긴 있는가 보다. 설이라고 차례도 지낼 수 있게 해주니, 민주주의 덕도 야무지게 챙기는 중이다. 대신 특식은 없다.
결국 그는 모진 목숨을 건사했고, 나는 나랏님이나 드나들던 곳에서 정초부터 차를 마시게 됐으니, 두루두루 나쁘지 않다.
점쟁이가 아주 선무당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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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을사년 평안하고 근사한 일만 가득하시기를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숑:)
Ps.
풍수지리 같은 거 하나도 몰라도 청와대가 얼마나 기가 좋은 곳인지는 이곳에 발을 내딛는 순간 느낄 수 있다. 북악산의 기운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고려시대부터 일본놈들까지 죄다 여기에 말뚝을 박으려 했지.
이런 신령스러운 곳에서 살면 죽는다는 점괘가 나오는 사람은 본인이 ‘험한 거’ 혹은 ’흉물‘이라는 뜻 아닌가? 험한 게 들어오니 북악산 신령이 노해서 막 살을 쏘는 거겠지.
악귀는 구치소에 영원히 봉인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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