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는 다시. 나로 살아간다.

마침내, 내 편이 되어준 나

by Helia

아이는 오늘도 길을 걸었다.
예전과 다르지 않은 골목, 다르지 않은 바람,
하지만 발걸음의 감각은 분명히 달랐다.
땅을 딛는 무게가 가벼웠고,
가방끈을 쥐는 손에도 힘이 덜 들어가 있었다.

“이제는… 조금 괜찮아.”
아이는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그 말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실려 있었다.
그동안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써온 나날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삼켜야 했던 말들,
밤마다 혼자 끌어안고 잠들던 속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을 지나, 이제는
조금씩 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길가 벤치에 앉아 아이는 작은 일기를 꺼냈다.
며칠 전 곰 인형을 샀던 날부터
아이의 일상에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편의점에서 직접 고른 요구르트 두 개,
마음에 들어 가져온 꽃잎 하나,
창문에 붙은 무지개 스티커,
그리고 아직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꿈 하나.

그 꿈은 아주 작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꼭 거창한 역할이 아니어도,
마음이 부서진 사람 옆에 조용히 앉아줄 수 있는 사람.

예전의 자신이라면 감히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누군가를 도울 여유 따위는 없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누군가가 그랬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누군가를 진짜로 안아줄 수 있다고.

아이는 그 말을 문득 떠올렸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아직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 마음이면,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작은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아이의 앞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고,
그 순간 아이는 눈을 감았다.

예전의 기억들이 희미한 빛으로 떠올랐다.
모든 걸 잘해야 했고,
누군가의 기대를 어기지 않아야 했고,
“괜찮다”는 말을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살아야 했던 날들.

하지만 이젠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울고 싶으면 울고,
멈추고 싶으면 멈춰도 괜찮다.
누군가의 기준을 따라가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방향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이는 곰 인형을 가방에서 꺼냈다.
말이 없지만, 언제나 같은 얼굴로
자기를 바라봐주는 존재.
그 인형을 안고, 아이는 속으로 말했다.

“이제는… 나로 살아볼게.”

말하는 내내,
그 말이 참 따뜻하게 마음 안에 머물렀다.

그건 단지 결심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감춰야 했던 아이가
드디어 자신을 향해 한 발 내딛는 선언이었다.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아이 곁을 스쳤다.
꼬리를 살랑이며, 아이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벤치 아래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는 말없이 웃었다.

“너도 혼자야?”

고양이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혼자일 때도 괜찮다고,
너는 이미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날 밤, 아이는 거울 앞에 섰다.
오랜만에 거울 속 자신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늘 피하거나 지나치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오래도록 마주 보고 있었다.

거울 속 그 아이는
예전보다 조금 더 단단했고,
조금 더 부드러웠고,
조금 더 ‘자기 자신’처럼 보였다.

“잘 살아가고 있어.”
그 말은 거울 속 자신에게 전한 인사이자,
앞으로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해주기로 한 약속이었다.

이제는 누가 옆에 없어도,
조용한 하루를 견디는 자신이 있었고,
작은 것에 웃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

아이는 스스로를 믿기 시작했다.
넘어질 수도 있고,
무서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나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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