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무인 등대의 비밀

by Helia

해질 무렵, 바다는 깊은숨을 들이켰다. 파도는 조용했고, 하늬의 귀 끝에는 희미한 떨림이 일었다. 솔, 달, 루카—세 친구와 함께 다시 섬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건만, 섬의 공기는 어딘가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날도 바람은 섬의 가장자리로 고양이들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옅은 안개 너머로 실루엣처럼 떠오른 것. 낡고 외로운 무인 등대였다.

“예전에 들은 적 있어. 아무도 살지 않는 등대가 하나, 섬 끝자락에 남아 있다고.” 솔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왜 무인일까?” 달의 눈빛은 바다를 넘고 있었다.

하늬는 잠시 말을 아꼈다. 어릴 적 바위 너머로 언뜻 본 그 등대. 희뿌연 기억 속에서조차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던 장소였다.

루카는 입을 열었다. “한 번 가본 적 있어. 도시에서 막 돌아왔을 때. 빛도, 사람도 없었는데… 이상했어. 누가 보고 있는 느낌. 고양이 말고, 다른 무언가가.”

고요한 파도가, 그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바위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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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하늬는 등대를 향해 혼자 걸었다. 흙길은 숨겨진 듯 좁고, 잡초는 무성했지만, 그녀의 걸음은 단단했다. 구름 아래 회색빛으로 물든 등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된 돌벽, 깨어진 창, 그리고 벽면을 따라 난 길고 가느다란 고양이 발자국들.

하늬는 그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나무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책 한 권.

낡고 바랜 노트였다. 표지엔 희미한 손글씨.

『기록 - 이곳을 지나는 고양이들에게』

하늬는 숨을 멈췄다. 장을 넘기자, 수십 페이지에 걸쳐 다른 필체들이 빼곡했다.

“1월 9일. 파도가 심하다. 오늘도 혼자다.”

“2월 14일.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이름은 루카였던가.”

“3월 1일. 등대에 별빛이 스며들었다. 오래간만에 무언가 따뜻했다.”

하늬는 이 노트가 고양이들 사이에서 이어져 온 일종의 ‘등대일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름 모를 고양이들이 이곳을 거쳐가며 남긴 말들. 그 기록들 사이로, 루카의 흔적도 분명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몇 장은 달랐다.

갈겨쓴 문장, 번진 잉크, 떨리는 필체.

“나는 더 이상 빛이 아니다.” “기다리다 지쳤다.” “누구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럼에도 나는 여기 있다. 아직, 여기.”

그 말이 하늬의 가슴에 박혔다. 말없이 등을 기대고 창을 올려다보니, 부서진 유리창 너머로 별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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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하늬는 등대에 솔과 달, 루카를 데려왔다. 등대 중앙에는 모닥불이 작게 피워졌고, 네 마리 고양이는 그 불을 둘러싸고 앉았다.

“이 기록… 그냥 말들이 아니야.” 하늬가 말했다.

“누군가 이 섬에, 이 등대에 계속 돌아오길 바랐던 거야.”

솔이 노트를 넘기며 말했다. “이건 혼자가 남긴 연기야. 누군가 보길 바라며 피운 불꽃.”

루카는 말없이 벽에 등을 기댔다. 그의 눈빛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오래전 이 등대 안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듯했다.

“그럼 우리가 그 답장이 되어야겠지.” 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하늬는 자신의 파란 스카프를 풀어, 기록부 위에 덮었다. “이제 이건, 우리 모두의 기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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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섬의 바깥쪽 해안 마을에서는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등대 불빛이 다시 살아났대.” “밤이면 고양이 네 마리가 불을 지킨다고 하더라.”

물론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섬의 밤하늘엔 분명히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그 불빛은 마치 오래된 별 하나가 다시 깨어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등대 안, 새로운 페이지가 매일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하늬 – 오늘도 우리는 모였다. 등대는 여전히 따뜻하다. 바람은 매섭지만, 마음만은 흐려지지 않는다.』

『솔 – 등대 벽에 그려진 고양이 그림자를 봤다. 우리 중 누구의 모습일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

『달 – 바다 냄새가 짙다. 등대 계단 밑에서 작은 발자국을 봤다.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내일은 조심히 살펴봐야겠다.』

『루카 – 예전엔 이 등대가 무서웠다. 지금은, 그때 내가 남긴 외로움을 다시 안아주는 기분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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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여전히 차갑고 바다는 깊다. 하지만 무인 등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빛은 다시 피어났고, 그 빛 아래, 고양이 네 마리는 오늘도 조용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 그렇게 하나의 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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