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빛 약속
바다의 어둠을 뚫고, 새벽빛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네 고양이의 등이었다. 고요한 숨결로 파도를 듣던 하늬, 그 옆에 조용히 몸을 말고 앉은 달, 그들을 바라보며 앞발을 가만히 모은 루카,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전히 말을 아끼던 솔.
그들은 그날 새벽, 오래된 약속을 다시 꺼내 들었다.
"기억나? 여름이 바닷가 모래에 조개껍데기를 하나씩 심어두던 날."
달의 목소리는 바람을 닮았다. 멀리서 들려오지만 분명한.
하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래알 사이에 숨어 있던 별. 그걸 찾는다고, 여름은 하루 종일 바닷가를 뛰어다녔지."
그 말을 들은 솔이 작게 웃었다. "우리는 그걸 따라다니며 모래탕을 만들었잖아."
그리고 루카는 말없이, 작고 낡은 병 하나를 조심스레 꺼냈다.
병 속에는 말라붙은 조개껍데기와 색 바랜 쪽지가 하나 있었다.
그 쪽지엔, 여름의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다시 이 자리에 모이면, 별을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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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네 마리 고양이는 섬을 다시 걸었다. 어릴 적 뛰놀던 절벽 위 풀밭, 모래와 바람이 얽히던 바닷가, 파도에 닳은 바위굴과 숨겨진 통로까지.
하지만 여름의 흔적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잊힌 기억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하늬는 오래전, 파도에 빠질 뻔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가장 먼저 물속으로 뛰어든 건, 다름 아닌 여름이었다.
달은 등대 뒤편 낡은 담벼락 아래에서, 조용히 쉬던 여름의 옆모습을 기억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람을 듣고 있던...
루카는 해 질 무렵, 여름이 혼자 앉아 별을 그리던 폐건물 옥상을 떠올렸다. 별을 세다 잠든 그의 얼굴엔, 이상할 만큼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솔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병을 품에 꼭 안고 다녔다.
그 병이야말로, 여름이 남긴 마지막 자리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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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바람에 밀려온 종이배 하나가 모래사장에 걸려 있었다.
하늬가 가장 먼저 발견했고, 달과 루카, 솔이 그 뒤를 이었다.
종이배 안엔 작은 노트 한 권이 있었다.
“나를 찾고 있다면, 새벽빛이 가장 먼저 닿는 곳으로 와 줘.”
글씨는 익숙했다. 여름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네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늬, 달, 루카, 솔.
그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종이배는 하늘로 날아가지 않았고, 대신 모래 위에 곧게 눕듯 멈춰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하늬가 묻자, 솔이 병 속 조개껍데기를 꺼냈다.
그 조개껍데기엔, 희미하게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새겨져 있었다.
"등대보다 더 동쪽,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바위 언덕일 거야."
루카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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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네 마리 고양이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별 하나 떠 있는 하늘 아래, 조개껍데기를 품은 채.
언덕에 도착했을 땐, 바람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그 자리는 어릴 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바위와 모래가 섞인 절벽 가장자리, 바람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
그런데, 그 중심엔…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번 병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지만, 병 주위에는 조개껍데기로 작은 별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병 밑면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자리는, 항상 새벽이었다.”
루카가 천천히 말했다. “여름은 우리가 이곳에 올 걸 알았던 거야.”
달이 병을 안고, 그 자리에 앉았다.
솔은 말없이 등을 돌려 바다를 향해 눈을 감았고,
하늬는 병 곁에 조용히 모래 위에 이름을 새겼다.
하늬. 달. 루카. 솔. 그리고 여름.
다섯 개의 이름이, 바람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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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 첫 빛이 바다 위를 스치자마자.
모래 위 이름들에 빛이 내려앉았다.
하늬는 속삭였다. "약속, 기억할게. 다시는 흩어지지 않겠다고."
달이 작게 웃었다. "기억은 흩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자리에 숨는 거야."
루카가 병을 들고 조개껍데기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우리가 찾은 두 번째 별이야. 이제, 하나 남았어.”
솔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하나는, 여름이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우리의 이야기 속 어딘가에."
그들은 더 이상 여름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대신, 여름이 남긴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이어갔다.
병 속에 쪽지를 넣고, 그 위에 작은 조개껍데기를 얹으며.
“여름아, 우리는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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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멀리서, 아직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다섯 번째 발자국 소리가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울리고 있었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별 하나가 다시 떠오르듯,
새로운 약속은 그렇게, 새벽빛을 따라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