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바람이 감춘 이야기

by Helia

바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늘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같은 방향을 반복해서 휘돌았다. 하늬는 그 바람 속에서 오래 전의 흔적을 느꼈다. 가느다란 숨결, 희미한 이름, 그리고 누군가의 마지막 발걸음.

섬에서 도시로, 도심에서 무인 등대로 이어진 여정은 다시 한번 고요한 물결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이번엔, 바람이 길을 냈다.

루카는 바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날도 이런 바람이었어. 여름이 사라졌던 날."

여름. 오래전, 네 마리 고양이와 함께 등대에 머물던 마지막 존재. 그는 말없이 사라졌고,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다만 등대의 한 모서리에, 그의 털 한 올이 남아 있었을 뿐.

달은 하늬 옆에서 꼬리를 말아 쥐며 낮게 울었다. “바람이 감췄던 거라면, 바람이 다시 데려다 줄지도 몰라.”

그 말에 솔이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는 저녁 하늘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기억은 흩날리는 게 아니라, 숨는 거야.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하늬는 그 말을 품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가장 많이 스치는 숲 끝자락에 폐가 하나가 있었다. 등대보다 더 오래된 듯한 벽돌 건물. 지붕은 기울었고, 창문은 깨져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낯익었다. 이곳, 여름이 머물던 마지막 장소.

그들은 벽 틈 사이로 조심히 들어갔다. 바닥은 먼지로 덮여 있었고, 구석엔 찢어진 천 조각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천 엔 희미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 우리가 있었다.

네 마리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 상자 안에는 바랜 수첩 한 권. 펴보자 고양이 발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엔 낡은 리본이 살며시 얹혀 있었다. 리본 끝에는 작은 구슬 하나. 그 구슬 속엔 빛이 담겨 있었다.

하늬는 가만히 그 리본을 쓰다듬었다. “여름이 남긴 거야… 이건, 사라진 게 아니라 감춰져 있었던 거야.”

루카가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우린 그 기억을 다시 꺼내기 위해 돌아온 거였나 봐."

그 순간, 문 밖에서 바람이 강하게 몰아쳤다. 사라진 천이 허공을 날아올라 폐가 천장에 걸렸다. 그 아래, 햇빛 한 줄기가 내려와 구슬을 비췄다.

빛은 리본을 타고, 그들의 눈에 도달했다.

순간, 하늬는 여름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따스한 시선. 그리고 늘 웃으며 하던 말. “네 자리를 기억해 줄게.”

그 말이, 지금 다시 들리는 듯했다.

그날 밤, 네 마리 고양이는 폐가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되새기고 있었다.

“여름은 사라진 게 아니야.” 하늬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한, 여긴 아직 네 자리야.”

솔이 그 옆에 발을 얹었다. "기억은 다시 쓸 수 있어. 바람에 실어, 별까지 닿게 만들 수 있어."

달은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댔다. “다시 그리자. 우리가 잃었던, 우리가 지키고 싶은 이야기들을.”

루카는 바람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고양이들이 이 자리에 도착했을 때, 이 모든 걸 발견할 수 있도록.”

그는 구슬을 품 안에 넣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차가운 것이 아니라 따스한 숨결로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폐가 벽에 조심스레 문장을 새겼다.

우리는 이곳에 있었다.

그 글씨 옆에는 하늬, 루카, 달, 솔. 네 마리 고양이의 이름이 각각의 발도장과 함께 새겨졌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고 흐릿한 글씨가 있었다.

여름. 다시 만나기를.

하늘은 고요했고, 바다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폐가 뒤편 숲 너머로 바람이 살며시 흔들렸다.

마치, 그 이름에 응답하듯.

그날 이후, 고양이들은 매년 같은 시기에 이 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같은 문장을 다시 새긴다.

우리의 이름은,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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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