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남긴 자리
그 빛 아래, 쓰러진 아이와 하니의 눈빛이 겹쳐지며 새로운 운명을 열고 있었다.
하니는 숨을 삼켰다. 아이의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쳤다. 낯설고도 익숙한 그 빛, 오래전 약속이 스쳐 지나갔다. 집 안 창가, 따스한 햇살, 작고 부드러운 손끝. “하니야, 내일도 꼭 와야 해.” 그날의 목소리가 눈발을 헤치며 다시 돌아왔다.
하니의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심장은 뜨거웠다. 그 뜨거움이 아이의 미약한 숨결과 닿아 퍼져나갔다. 아이의 손끝이 떨리며 하니의 털을 스쳤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하니…” 아이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눈보다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그 한 마디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릴 만큼 또렷했다.
하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나 여기 있어.”
눈보라가 잠시 멎었다. 고요 속에서 달빛이 내려앉았다. 은빛 파도가 하니의 몸을 감싸며 길을 그려냈다. 엘란이 숨을 죽였다. 솔은 눈가를 훔쳤고, 루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펜이 말했다.
“이제 가야 해. 그 아이가 널 기다리고 있었잖아.”
하니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따스함이 서서히 돌아왔다. 아이의 작은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살아 있다. 그 단순한 사실이 하니의 세상을 다시 빛으로 채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마다 달빛이 고였다. 마치 길이 그들을 위해 생겨나는 것 같았다.
뒤에서 바람이 울었다. “돌아가.”
하니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차갑지 않았다. 눈송이마다 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잃었던 건 내가 아니라, 우리였구나.”
하니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멀리 항구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달빛이 부서져 바다 위로 흩어졌다. 하니는 고양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이의 마음으로 걸었다. 그 길 끝에는 집이 있었다. 창가에 걸린 커튼, 낡은 책상, 그리고 그리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하니는 살짝 꼬리를 들어 그 빛을 닮은 눈송이를 털어냈다.
“이젠 다시는 길을 잃지 않겠지.”
눈이 멈췄다. 바람이 잠들었다. 세상은 고요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하니와 아이의 그림자가 눈 위에 길게 이어졌다. 그 길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니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그곳엔 다섯 마리의 고양이들이 서 있었다. 달빛 아래서, 아무 말 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하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멀어지는 발자국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 빛은 길을 비추고, 바람은 그 길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섬의 모든 눈이 멎을 때까지 —
하니와 아이의 이름은 천천히, 그러나 영원히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