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섯 살에 두 번의 파양을 겪은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마저 잃었다. 차갑게 문이 닫히는 소리, 낯선 언어, 익숙한 손길이 단숨에 사라지는 순간들을 지나면서 아이는 목소리를 쓰는 법을 까맣게 잊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건 잘 구겨지지도 않는 얇은 즉석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에는 두 아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한 아이는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었고, 다른 아이는 사진기 쪽으로 손을 내밀 듯 기울어 있었다. 오른쪽에 서 있던 아이가 바로 소녀, 하린이었다. 그리고 왼쪽에서 자그마한 어깨를 맞대고 서 있던 아이가 그녀의 쌍둥이 오빠였다. 헤어지던 날 고아원 직원이 급하게 찍어준 단 하나의 사진. 그날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오빠를 기억해 주는 유일한 증거. 그래서 하린은 이 사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밤에도, 낮에도, 밥을 먹지 않는 날에도, 낯선 방에서 울음을 삼키는 순간에도.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누군가는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무심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하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살아 있다면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여섯 살 아이에게는 너무 무겁고도 간절한 믿음 하나만 쥐고 있었다.
그 믿음을 붙들고 있던 날들 중 어느 날, 고아원 복도에 조용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하린은 문틈을 더 바짝 닫아버렸겠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문틈 사이로 익숙하지 않은 그림자가 멈춰 서는 걸 그냥 바라보았다. 그림자 주인은 금희였다. 중년의 여성, 두 아들의 엄마이자, 몇 달째 봉사활동을 해오며 아이들 사이에서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사람. 그녀는 그날따라 복도 끝 작은 틈에 웅크리고 있는 하린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늘 침묵 속에 숨어 지내는 아이. 말문이 닫힌 지 오래라고 들었고, 식사도 원하는 만큼 먹지 않으며, 다른 아이들의 소란에도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린다 했다. 하지만 금희의 눈에는 그 모든 침묵이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기다림 때문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사람의 침묵.
금희는 몸을 낮춰 조용히 앉았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숨까지 눌러 참으며 천천히 손을 내렸고, 그 손끝에 걸린 작은 기척에 하린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 사진을 숨기려는 듯 품에 꼭 끌어안았고, 그 동작에 금희는 사진 모서리에 적힌 연필 글씨를 잠깐 보았다. ‘하린 ♥ 하준’. 누군가 급하게 적고 지우고 다시 적은 흔적. 이름끼리 붙어 있는 그 작은 하트는, 어린 형제가 서로를 붙잡기 위해 남겨둔 흔적처럼 보였다. 금희는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이 아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단숨에 이해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처음 본 아이에게 들지 말아야 할 과한 연민 같은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끌림’이 생겼다. 이 아이를 내가 데려가야 한다는 감각. 누군가를 구한다기보다, 내가 더 먼저 이 아이에게 구원을 받는 느낌.
하린은 금희를 경계하는 듯했지만 쫓아내지는 않았다. 금희는 조용히 바닥에 작은 귤 하나를 두고 미소만 지었다. 억지로 먹이려 하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고, 기다리는 태도. 그게 오히려 하린의 마음을 조금 흔들었다. 금희가 떠난 후, 하린은 오랜 시간 가만히 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따뜻하지 않은 차가운 귤, 하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남겨두고 간 호의(好意)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몇 날이 지나고 금희가 다시 찾아왔을 때, 문틈 너머에서 하린의 미세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아주 작은 고개, 눈짓, 숨결 같은 떨림. 금희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 미세한 움직임은 분명한 신호였다. “왔구나.” 말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시선. 금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사진 속 남자아이는… 네 오빠지?”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을 꺼내는 손이 떨렸고, 금희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자 하린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이 사람은 내 소중한 것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런 확신이 아주 희미하게, 아이 마음 한가운데에 피어오르는 듯했다.
금희는 사진을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바라보고 말했다. “찾아줄게. 네 오빠. 내가 꼭 찾아줄게.” 마치 오래전에 약속했던 말을 다시 꺼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조용한 어조였다. 그 약속에는 불필요한 감정도, 동정도 없었다. 그저, 한 어른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의지였다. 하린은 그 약속을 듣고도 사진을 다시 품에 넣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금희는 그 침묵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을 보았다. 말 대신 눈동자가 말했다. ‘정말?’
금희는 천천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집에 가자. 같이 살자. 오빠 찾는 것도 같이 하면 돼. 너 혼자가 아니야.” 그 말은 오래 묶여 있던 매듭을 풀기 위한 첫 번째 손짓이었다. 하린은 한참 동안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지금 손을 잡아버리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문을 여는 것처럼 느껴지는 듯. 그리고 마침내 손끝이 금희의 손가락에 닿았다. 잡았다고 부르기도 어려운, 아주 여린 접촉. 금희는 그 접촉 하나에 눈물이 날 뻔했다. 하린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내민 손. 말보다 더 큰 구조요청.
금희의 차를 타고 처음 집으로 가던 길에서 하린은 한 번도 창밖을 보지 않았다. 무릎 위에 사진을 올려두고 금희가 준 담요를 덮으며 조용히 숨만 쉬었다. 금희는 아이를 괜히 안심시키려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네가 잃어버린 걸 찾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해볼 거야.”
집 문을 열자 열 살 오빠와 여덟 살 오빠가 슬리퍼를 가지런히 놓으며 서 있었다. 두 아이는 하린을 보고 놀라거나 부담을 주지 않았다. “오빠들이야. 괜찮아.”라는 금희의 말에 따라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린은 본능적으로 금희 뒤에 숨었고 오빠들은 한 발 물러났다. 배려라는 걸 말로 배우지 않아도 아는 아이들이었다. 어린아이들답게 호기심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말을 걸지 않았고, 억지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하린에게 더 큰 안도를 줬다.
그날 밤, 하린은 새 방의 낯선 이불속에서 사진을 품에 넣고 누웠다. 문틈 너머로 들려오는 오빠들의 목소리—“엄마, 문 좀 조용히 닫아줘. 동생 깰까 봐.”—“밥 더 먹을래?”—“미역국 너무 짜!”—그 일상의 소리들이 이상하게도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생활 소리가 이렇게 따뜻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하린은 그날 처음 알았다. 금희가 한 약속이 귓가에서 다시 떠올랐다. ‘찾아줄게. 오빠. 꼭.’ 그리고 아이는 잠들기 전에 아주 작은 숨을 내쉬듯 속삭였다. 누구도 듣지 못한 목소리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잃어버린 목소리의 가장 작은 조각으로. “오빠…”
그날, 하린의 세상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균열은 15년 후, 오랜 침묵을 깨고 나갈 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 지금은 다만, 쌍둥이 오빠를 찾기 위한 여정이 조용히 시작되었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시작은 모든 이의 삶을 바꿔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