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화

문틈에 스며든 첫 번째 봄빛

by Helia

어젯밤, 하린은 단 한순간도 깊게 잠들지 못했다. 금희가 방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천장에 번지는 희미한 불빛과 낯선 집의 숨소리가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이 집은 안전한 곳일까?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세 번째로 떠밀려나지 않을까? 여섯 살의 몸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오래된 질문들이 머리맡에서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든 불안 한가운데에서도 희미하게 떠올랐던 것은 금희의 그 한마디였다. “오빠 찾아줄게. 우리 같이.” 그 말은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던 시간 속에서 처음 건네진 약속이었다. 하린은 눈을 감고 사진을 품에 안았다. 사진 속에서 오빠의 손이 자신과 닿아 있던 그 장면만이 밤을 버티게 하는 작은 숨 같은 것이었다.

아침이 오자 문틈 아래로 부엌 불빛이 깔렸다. 따뜻한 미역국 냄새가 천천히 스며들었고, 뒤이어 금희의 부드러운 노크가 세 번 들렸다. “하린아, 일어나자. 같이 밥 먹자.”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닫힌 세계를 억지로 열려하지 않는 목소리. 그러나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같이 밥 먹자’는 말이 어린 몸에 얼마나 무거운 초대인지, 금희는 알고 있었던 듯 더 부르지 않았다. 잠시 후 식탁 쪽에서 조용한 대화가 들렸다. “엄마, 하린은?” “기다려야지. 너무 빨리 다가가면 아이가 놀라니까.”

하린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배가 자꾸만 괴롭혔다. 식탁으로 나가 먹고 싶다는 마음과, 그곳에 자리하는 것이 두렵다는 감정이 서로 부딪혔다. 자신을 환영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실망할 거라는 두려움. 하지만 문틈 아래로 스며드는 부엌의 냄새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발끝을 움직이게 했다. 잠시 후, 하린은 사진을 품에 질끈 안고 조심스럽게 방문 고리를 잡았다. 손이 떨렸다. 문 너머로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혹시 이 집도 자신을 돌려보내는 곳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미약한 봄빛이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식탁에는 세 사람이 이미 자리해 있었다. 열 살의 큰오빠는 말도 없이 미역국을 숟가락으로 천천히 젓고 있었고, 여덟 살의 작은오빠는 달걀프라이를 반으로 자르더니 자신이 좋아하는 노른자 부분을 하린 자리 쪽에 살짝 밀어놓았다. 금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린을 바라보았다. 강요도, 환영도, 부담도 없었다. 그저 ‘네가 오는 만큼만 와도 괜찮아’라는 조용한 눈빛이었다.

하린은 식탁 앞에서 멈춰 섰다.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작은오빠는 조심스럽게 하린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더니 발끝을 식탁 아래로 살짝 뒤로 뺐다.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은 듯. 금희는 하린의 작은 움직임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말했다. “여기 앉아도 좋아.” 하린은 천천히 의자에 걸터앉았다. 두 손은 무릎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머리맡에서 사진의 모서리가 간지럽게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낯선 사람이 많아도 이 사진만큼은 자신을 지켜주는 작은 문처럼 느껴졌다.

금희는 숟가락을 들지 않고 말없이 하린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짧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돼.” 그 말은 하린의 두려움 깊숙한 곳을 조금 흔들었다. 지금까지의 어른들은 늘 ‘먹어라’, ‘왜 안 먹니’, ‘말 좀 해봐’라고 재촉했었다. 단 한 번도 ‘안 먹어도 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은 마치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아’라고 들렸다.

결국 하린은 작은오빠가 건넨 달걀프라이의 모서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노른자가 손가락에 살짝 묻었다. 그 따뜻함이 이상하게 가슴 안쪽까지 닿는 느낌이었다. 작은오빠는 자신이 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소리 없이, 하린이 놀랄까 봐. 금희는 자식 둘을 키워 온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어떤 반응도 내지 않았다. 감정을 드러내 흡수시키지 않는 방식. 하린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마음을 열게 하는 방식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금희는 하린의 방 앞에 작은 의자를 들여놓았다. “잠깐 여기 있어도 될까?”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금희는 강요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한쪽 벽으로 따스한 햇살이 번지고, 바람 한 줄기가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하린은 사진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금희는 그 사진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직 하린이 가리키는 곳만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서 오빠의 손이 하린과 닿아 있는 자리. 하린의 손가락이 그곳을 톡, 짚었다. 금희는 조용히 말했다. “응. 오빠. 같이 찾자.”

그 순간, 하린의 눈동자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침묵이 이렇게 크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금희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손을 잡는 일조차 아이에게는 선택이어야 했기에. 바람만이 두 사람 사이를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하린은 처음으로 사진을 금희 쪽으로 조금 더 밀어놓았다. 아주 조금.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신호였다. ‘믿고 싶다. 정말로.’

그날 저녁, 작은오빠는 하린의 방 앞을 지나다 문틈 아래로 과자를 하나 밀어 넣었다. 소리 내지 않고, 알아달라고 하지도 않는 선물이었다. 하린은 과자를 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천천히 과자를 손에 쥐었다. 작은오빠는 그걸 확인하고 달려가지 않고 뒤돌아서 천천히 걸어갔다. 그 모습이 또 하나의 온기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자꾸만 자신을 떠났다. 누군가는 자신을 밀어냈다. 그러나 이 집의 사람들은 다가오고 싶어도 조심히 멈추어 주었다. ‘너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몸짓처럼.

밤이 찾아오자, 하린은 창가에 앉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 대신, 이제는 방 안에 고여 있는 넓은 봄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금희가 말했던 ‘우리’라는 말이 머릿속에 오래 맴돌았다. ‘우리 같이.’ 그 말은 오래 굳어 있던 마음의 얼음 위에 아주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균열은 빛이 스며드는 통로가 되었다.

잠들기 전, 하린은 오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아주 작은 숨결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린에게 있어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불러본, 그날의 첫 봄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또 하나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금희의 가슴속에서도, 두 오빠의 마음 깊은 곳에서도, 그리고 아주 멀리 어딘가에서도—어쩌면 하린의 쌍둥이 오빠가 있는 곳에서도—어떤 조용한 움직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찾아들기 시작한다.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 채로.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