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끝나지 않는 사투, 털과의 전쟁
나는 검은 옷을 싫어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색에 면 소재인 옷을 싫어한다. 나일론처럼 맨질맨질한 재질은 괜찮다. 나는 세탁기를 싫어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세탁하고 나서도 더러운 세탁물을 싫어한다. 나는 이불을 싫어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 털이 박힌 이불을 싫어한다. 새로 산 이불은 3일 정도는 덮을만하다.
그렇다. 고양이를 키움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털이다. 새로 산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잠시 소파에 앉았을 뿐인데 엉덩이 부분에 하얗게 털이 붙는다. 더러워진 옷을 세탁기에 돌려도 털은 그대로 박혀 있다. 세탁 서비스도 고양이 털이 박힌 이불은 세탁을 반려한다. 아침에 일어나 눈이 간지러워 거울을 보면 속눈썹에 고양이 털이 앉아 있다.
김용택 시인이 쓴 '그 여자네 집'에 등장하는 여인의 속눈썹에는 하얀 눈이 걸려 있다는데, 나의 속눈썹에는 아침마다 하얀 고양이 털이 걸려 있다. 자주 빗질을 해주면 죽을 털이 빠져서 털 날림이 덜하다고 하는데, 우리 집 고양이 로나는 빗질을 너무 싫어한다.
아오, 지긋지긋해!
그렇다. 고양이와 함께 살면 인간의 존엄성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고양이 털이 내려앉(은지도 몰랐던) 저녁밥을 먹거나, 아침저녁으로 청소기를 돌려도 발바닥에 털이 계속 붙거나, 분명히 찍찍이로 정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잔뜩 털이 박힌 셔츠를 입고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신분이나 신체적 조건, 성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이다.
집사만 괴로운 게 아니다. 고양이도 괴롭다. 그루밍을 하노라 치면 길고 긴 털을 꿀꺽꿀꺽 삼켜버려 가끔 헤어볼을 토하질 않나, 무더운 여름이 되면 더위를 식히려 가만히 죽은 듯 마룻바닥에 누워있다.
2019년 여름, 한여름의 열기로 장판마저 뜨겁게 달아오른 어느 날. 고양이 털을 자르기로 결심했다. 고양이는 강아지처럼 입을 열고 숨 쉬지 않는데 (개구 호흡) 너무 더워서인지 로나가 입을 열고 숨을 쉬더라. '고양이 미용'을 검색한다. 고양이는 강아지보다 털 깎기가 어려워서 미용할 때 보통 마취를 시킨다. 얼마나 끔찍한가. 헤어샵에 갔는데 마취를 하고, 눈 떠보니 머리카락이 잘려 있다면 말이다. 미용하는 샵까지 왔다 갔다 이동하기도 고양이에겐 대단한 스트레스다.
그래서 집까지 출장 와주는 고양이 미용 전문가를 가까스로 찾아내었다. 그리고 대망의 미용하는 날. 전문가는 방 한쪽에 기괴한 선반을 설치했고, 로나의 발을 테이프로 감았다. (뗄 때 너무 아프지 않을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고양이 털을 깎기 시작했다. 몸부림치는 녀석을 달래기 위해 나는 한쪽에서 츄르를 정수기처럼 공급했고, 전문가는 면도기로 단 1mm의 오차도 없이 로나의 털을 정리했다.
땀을 뻘뻘 흘린 사투가 30분 정도 지났을까. 방은 양털 농장처럼 털로 가득해졌고 로나는 비쩍 마른 벌거숭이가 되었다. 살이 찐 것이 아니라 털이 쪘었구나. 목욕까지 마치자 녀석은 완전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머리 빨, 고양이는 털 빨'. 그날 밤은 로나도 나도 조용히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이후엔 고양이 전용 바리깡을 사서 직접 털을 밀어주고 있다. 워낙 몸집이 크고, 털 미는 것을 싫어해서 다 정리하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리기도 한다. 오늘은 오른쪽 앞다리, 내일은 등, 모레는 뒤통수 이런 식으로... 내가 직접 털을 밀면 마치 비포장 도로처럼 로나의 몸이 울퉁불퉁 볼품없어진다. 물론 2주 정도 지나면 다시 봐줄 만한 털찐이가 된다. 그나마도 혼자서는 도저히 역부족이라 가끔씩은 온 가족이 달라붙어서 한 명은 다리를 잡고, 한 명은 츄르를 먹이고, 한 명은 바리깡으로 털을 미는 식이다.
털과의 전쟁은 항상 진행 중이다. 그나마 한 마리였던 고양이가 지금은 두 마리가 되었다. 털도 두 배로 날린다. 그래도 집사는 행복하다. 고양이의 일생을 함께 한다는 것은 털과 공생한다는 말 없는 약속이다.
로나야, 로찌야, 그리고 너희의 털들아.
나랑 평생 행복하게 살자.
와디즈 경영추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