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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Jun 18. 2023

내 얘기좀 들어줘


# 몇년 전 일이다. 회사 들렀다 저녁약속 가는데 여의도 공원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건설노조 조끼를 입은 무리에게 한 할머니가 소리쳤다. 아저씨들 왜 이렇게 서민들을 힘들게 해요, 버스에서 내려서 30분넘게 걸었더니 허리가 부러질거 같아요, 했다. 서울 마포대교 점거에 따른 불만이다. 당시 노조가 대교를 막아 차량 통행이 마비됐고, 극도의 혼란이 빚어졌다. 모두가 타고 있던 버스나 택시에서 내려 대교를 걸었다. 누구는 큰 소리로 욕을 했다. 모두가 지쳐보였다.


그러자 지나가던 다른 시민이 대꾸했다. 오죽 먹고사는게 힘들면 추운데 저러겠어요. 저 사람들도 서민이에요, 라고 응수했다. 사실 그 장면은 매우 기이했는데 투쟁의 머리띠를 두른 이도 서민, 몸빼 바지의 할머니도 서민, 동원된 전경과 정보 경비과 경찰 아저씨들도 서민, 약속에 늦을까봐 지하철 역으로 짜증내며 뛰어가던 나도 서민인데 서민들끼리 서로 '같은 서민끼리 이러면 쓰나' 하며 싸우고 있었다.


언론과 여론은 그들의 시위 방식에만 초점을 맞췄다. 자연히 목적은 뒤에 가려졌다. 당시 건설노조는 건설근로자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의 통과를 촉구하는 과정에서 국회 앞 집회를 이어갔고, 조합원들이 마포대교까지 점거했다. 건설 노동자들이 안전하지 않은 근로환경에서 일하고 있고, 임금이나 처우도 미비하다며 관련 법안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 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를 직접 경험했다. 시위하는 그들을 보진 못했지만 지하철 먹통으로 회사에 늦은 적도 있다. 너무 짜증이 났다.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는 걸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사명 또는 승리로 받아들이는 전장연 때문에 장애인 단체 자체를 혐오하게 될 지경이었다. 왜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면서까지 이래야 하는 건지. 장애인 분들이 힘들게 사는건 알겠는데, 왜 역시 힘들게 사는 우리까지 더 힘들게 하는 건가.


전장연은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사항으로 내걸었지만 사실상 장애인 권리예산이 핵심이라는 분석도 있다. 특히 전장연은 탈시설을 강조하고 있다. 탈시설은 장애인이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자립하고 비장애인과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모든 장애인을 시설 밖에서 돌보기 위한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증 장애인을 24시간 돌보기 위해선 8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4조 3교대 근무가 필요하다.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최소 네 명이 있어야 한다. 한 달에 월급으로만 1300만~1400만원 정도 들고, 1년이면 1억5000만~1억6000만원이 소요된다.


전장연은 지난 수십년간 장애인 권리는 비용 논리로 늘 후순위로 밀려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장애인 예산 규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소수자가 비단 장애인 뿐일까. 몸은 성해도 저소득층 최저생계층이 즐비하다. 결국 희소한 자원과 돈을 어떻게 쓸지의 문제인데, 전장연의 주장을 100% 반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런 이른바 '민폐 시위'를 대하는 시각은 두 가지다. '깨어있지 못해 약자를 위한 잠깐의 불편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지적이 있다. 반면 '왜 남들한테까지 피해를 주며 땡깡을 부리느냐'는 날이 선 말도 나온다. 퇴근길을 막거나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면 어떤 욕을 들어 먹을지 알면서도 '우리 좀 봐달라'고 온몸으로 피력하는 그들이 안쓰러운데, 내 깨시민 코스프레의 한켠에는 '왜 애꿎은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나' 하는 생각도 여전하다. 비겁한 양시론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게 딱 그렇다.


건설노조 간부들은 마포대교 점거 혐의로 사법기관의 처벌을 받았다. 전장연을 향한 경찰수사도 진행 중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까지 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곱씹을 필요가 있다. 소수자가 어떤 일을 겪고 있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반추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 환자의 진료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던 일부 의사들보다는 그래도 이런 방식의 시위가 그나마 사회에 덜 유해하다는 생각도 든다. 강제력을 동원한 힘 있는 자들의 시위는 단순한 불편의 차원을 넘어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협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사 등 직능단체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억울하고 힘들고 부조리한 제도와 관행을 바꾸고 싶어하는데 이 억울함을 알릴 방법은 없으니 통탄할 따름이다. 그러니 인맥 정치, 접대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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