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dy Dec 12. 2023

내일은 뭐 쓰지

발제만 안 해도 너무 좋겠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온다. 씻고 나와서 잠시 누웠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일어난다. "내일 별다른 자료도 없고, 발표도 없는데 뭐 발제하지..." 밤늦게 찾아봤자 뭐가 나오겠나. 취재원에게 전화해서 읍소하고, 국회예산정책처나 입법조사처도 뒤져보고, 하다못해 OECD 홈페이지까지 찾아본다. 그래도 없다. 어떡하지.. 그렇게 끙끙대다 지쳐 잠든다. 내일 오전에 연합에서 뭐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하면서.


수습시절, 선배에게 발제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다. "오늘 보고한거, 발제로 정리해봐." 발제라고? 무슨 학술 토론대회에서 내가 좌장이 되어 뭔가를 발표할 때 쓰는 단어 아닌가. 언론계에선 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기자 본인이 무슨 기사를 쓰고 싶을때 팀장이나 데스크, 부장에게 기사의 대략적인 주제와 내용, 형식을 정리하는 걸 발제라고 한다. 이런식으로 기사를 쓰겠다고 미리 알리는 것이다. 발제는 쉽게 말해서 기사를 다 써놓고 '~다'로 끝나는 어미를 '~음' 등으로 바꾼다고 보면 된다. 


발제의 종류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자료 기사. 가령 국토교통부가 내일 층간소음 대책을 발표한다고 가정해보자. 층간소음은 아파트 시대에 모두가 관심있는 아이템이다. 그러니 1면에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고, 따로 박스(해설)기사도 써야 한다. 그러면 미리 배포된 보도자료를 보고 어느 내용을 1면에 넣을 것인지 미리 준비해야 한다. 기사 형식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최근 논란이 됐던 층간소음 분쟁 사례를 앞에 넣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층간소음 대책을 발표했다' 하는 식으로도 처리 가능하다.


다음으로는 기획 발제가 있다. 하나의 아이템을 잡아서 문제점과 해결책 등을 쓰는 것이다. 배포된 자료가 없고 따로 품을 들여야 하니 시간이 자료 발제에 비해 오래 걸린다. 다만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를 쓸 수 있어 준비하는 데 재미가 있다. 단독 기사도 비슷한데, 남들이 쓰지 않은 정부의 정책 발표나 내부 이야기를 쓰면 된다. 난 아직도 단독과 기획의 차이를 명확히 모르겠다. 공정위가 어느 기업을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나갔다는 것은 분명한 단독이다. 다만 정부가 준비해온 정책(예를 들면 상속세)이 올해 안에 처리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는 단독보다는 기획에 가깝다. 칼로 자르듯 명쾌하게 나만의 기사면 단독, 그렇지 않는 경우 기획 정도로 보면 되겠다.


우리 회사 정책팀은 '관가뒷담'이라는 칼럼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원고자 4.5매 분량이다. 정보보고성 기사라고 보면 된다. 각 부처 내부의 이모저모를 가볍게 쓰는 기사인데, 파급력이 상당하다. 얼마전 기재부 1차관이 새로 왔는데 고물가 상황에서 존재감이 약하다는 내용의 관가뒷담 발제를 올려서 처리했는데 반응이 엄청나게 왔다. 6~7매짜리 기획기사로 쓰기 어렵지만 관가에 떠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는 기사다. B to C 보다는 B to B 기사다. 실제로 관가뒷담은 공무원들이 정말 많이 본다고 한다. 자신들이 매일 겪는 회사일을 다루니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매일 아침 이런 류의 발제를 섞어가며 보고를 한다. 팀장이 보고를 취합해 올리면 데스크와 부장이 이를 다시한번 판단하고, 편집회의에서 또한번 발제를 한다. 부국장과 국장, 다른 부서 부장들이 크로스체크를 하며 기사의 경중을 나누고 방향을 정한다.


문제는 발제가 없는 날이다. 오늘 많은 기사를 써도 내일 발제가 없으면 말짱 황이다. 매일 오전 9시 40분까지 내가 맡은 기재부 산업부 농식품부 등에서 발제를 뽑아서 올려야 하는데 그런 날이 있다. 정말 아무것도 쓸게 없는 날이 있다. 자료도 그다지 얘기가 안되고, 연합이나 뉴시스 뉴스1에도 참고할 만한 기사가 전무한 그런날이 있다. 


오전 9시 30분이 됐는데도 뭐가 없을때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사건팀 때는 매주 회의를 해서 요일별로 발제거리가 정해져있으니 하루는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이상하게 정책팀에 와서는 그게 잘 안된다. 후배들도 각자 뭔가를 낼텐데.. 그러다 결국 요행으로 급조된 발제를 올리고 그게 잡히면 그때부터는 진짜 지옥이 시작된다. 추가 취재를 하다보니 기사 야마(주제)가 올린것과 정반대로 나타나면..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래서 온라인뉴스부 때가 참 좋았다. 난 온뉴부에서도 일명 속보팀에 있었다. 연합 등 통신사나 큰 발표자료를 엠바고 풀리는 시간에 맞춰 보내는 팀이었다. 따로 발제를 하지 않아도 되니 정말 행복했다. 남들이 쓰는 걸 그대로 베껴야 하는 건 좀 민망했지만, 온라인 뉴스 시대에 이런 역할을 하는 기자도 필요하다. 


고품격 양질의 발제를 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든다. 데일리한 발제를 하면서 또 새롭게 딥한 발제를 준비하는 것은 이중, 삼중의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이는 연차와 상관없다. 기사를 고치는 데스크 자리까지 올라가기 전까지는 항상 기자는 발제 압박에 시달린다. 오늘은 간신히 넘겼는데, 내일은 또 무엇을 쓸까. 어떤 발제를 내야 시의적절하고 또 독자들이 많이 읽을까.. 기자를 직업으로 택하는 순간 매일 되새겨야 할 숙명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 현재 기준으로 내일 발제가 없는데, 나도 참 10년을 넘게 해도 매일 이 모양 이 지경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