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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적 결정 장애자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요

by 애들 빙자 여행러

처음 집을 짓겠다고 했을 때 그리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건축 지식은 전무했지만 주변에 집을 직접 짓는 사람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땅을 샀으니 당연히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일생에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집을 짓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꼬마빌딩이나 리모델링 등 곳곳에 공사현장은 많이 보이는데 도심에서 단독주택 건설현장을 보는 건 쉽지 않다. 실제 내가 만나봤던 건축사들을 봐도 단독주택 포트폴리오가 그렇게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건축사들은 주택이 건물보다 더 까다롭다고 했다. 아무래도 건물은 일하는 곳이고 주택은 생활하는 곳이니 디테일하게 신경 쓸 것이 많다고. 그래서 건물 평수보다 주택이 작다고 설계비가 비례하여 작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집을 짓겠다고 건축사들을 만나 상담을 할 때 가장 처음에 듣는 질문은 바로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가” 또는 “어떤 집을 짓고 싶은가”였다.


언젠가 추운 겨울 눈 내리는 일본의 홋카이도 어느 지역에 빵 냄새 솔솔 나던 오두막집을 지나갈 때 너무나 평온하고 따뜻해 나도 언젠가 저런 집을 짓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핀터레스트나 월간지에서 차갑고 스틸로 된 검은 인테리어를 보면서 세련된 무엇을 마음에 담기도 했던 것 같다. 가족이 행복한 집, 목가적 분위기의 조용한 집, 햇빛이 비치는 집, 아니 고급스러운 분위기도 좋고요. 넓었으면 좋은데 좁아도 상관없어요. 하늘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바닥엔 물이 흐르고요. 지붕도 열리면 좋겠네요. 또.

스크린샷 2025-04-27 오후 9.05.10.png 홋카이도 비에이 어느 언덕

십중팔구 건축사들은 당황한다. 어떤 건축사는 A4 수십 장으로 된 설문용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우리 가족의 형태를 치밀하게 관찰하려는 목적으로 보였다. 가족의 행태와 사람의 로망은 다를 진데 어떻게 맞춰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난 그냥 집을 지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만 했지 꼭 집을 지어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도 없긴 했다.

나도 나를 모르겠어요


집을 짓는다고 하면 주변에서 많은 의견을 접수하게 된다. 2층은 필요 없어요. 활용도가 매우 떨어져요. 목조주택은 방음이 안되고 2층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요. 집 크게 지을 필요 없다. 관리하기 힘들다. 잔디 깔지 말아라. 보기엔 좋아도 그거 중노동이다. 일생에 한 번 짓는 집 제대로 지어야 한다 등등.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의견들을 모두 취합하다 보면 집은 너덜너덜 해질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정리가 안되어 집 짓는 일을 중단한 적도 있다.


두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은 예산에 대한 부분이다. "얼마 예산으로 지으려고 하느냐" 또는 "몇 평짜리 집을 지으려고 하느냐"인데. 통장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얼마나 돈이 필요한지 알고 싶기도 했는데. 궁금한 점은 실제 다른 건축주는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 집을 지을까? 몇 평을 원하는지 본인이 알고 있는 건축주는 얼마나 될까? 그런 걸 전혀 모르니 상담하고 협의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고 쫓아내지는 않는다.


세 번째로 많이 받은 질문은 구조, 재료, 공법에 대한 부분이었다. "어떤 재료의 집을 짓고 싶은지". 즉, 기본적으로 철근콘크리트, 목재, 철골 중 말이다. 나는 그저 춥지 않으면 좋겠어요. 이 또한 3가지 장단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모르니 선호도를 말할 순 없었다. 가장 흔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서 살펴보아도 너무 다양한 의견들이라 결론적으로 전문가가 결정해 주길 바랐다.


가끔은 AI가 나를 인터뷰해서 예산과 평수 콘셉트 등 모든 것을 제안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건축사를 만날 때마다 난 더욱 작아져 있었다. 너무나 명쾌하게 콘셉트와 실행 안을 갖고 있는 건축주를 보면 부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건축주의 운명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리라는 것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설계 단계에서 뿐 아니라 건축의 전 과정에서 벌어진다.


나는 회사나 일상생활에서 결정장애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자부했으나 건축에 있어서는 무색무취였던 것 같다. 한 때는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부족하고 불편한 것이 있다면 그때그때 바꾸어 나가면 되지 않겠느냐란 생각. 그저 내 한 몸 누을 공간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건축사에게 했는데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던 기억도 있다. 아마도 건축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비교분석 자체가 힘들어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고 볼 수 있겠다. 지식이 없다고 집을 짓는 것이 범죄는 아니지 않은가. 전문가만 집을 지으란 법도 없을 테니 말이다.


지식이 풍부하고 명확한 목적으로 효율적으로 집을 짓는다면 축복이겠지만 나처럼 이 혼돈의 과정을 해학과 웃음으로 잘 극복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 또한 해볼 만한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결정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닌 또 하나의 콘텐츠라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내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제주라는 섬에 집을 지을 수 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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