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뇌의 기술 다섯 번째 이야기
학창 시절 배웠던 ‘질량보존의 법칙’이 정확하게 뭔지는 잘 생각이 안 나긴 하는데 ‘행복 총량의 법칙’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행복의 양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이는 누구에게나 공평할 것이다란 이야기인데 당연하게 검증된 적은 없다.
내 주변에서 가장 뛰어나고 능력이 있으며 자라온 환경도 엄청난 ‘엄친아’가 있는데 이 친구가 점차 친해지면서 친구의 가정사나 개인적인 내막을 들려주었다. 너무나 힘겹게 살아가는 친구에 더욱 큰 동료의식을 느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하면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질 수도 있을 텐데 - 당사자에겐 아픈 이야기일 수 있으니 - 이런 류의 재벌가의 이야기나 유명인들의 삶 속에서 겪어야 하고 감당해야 할 사연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말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이 컸었다. 이런 일이 있었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의 처지를 비교해 보기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항상 부러워했던 이 친구보다 내가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고 느끼는 것은 단순한 보상심리만은 아닐 것이다. 그 후 뛰어난 사람을 볼 때마다 저분의 인생엔 다른 어떤 슬픔의 깊이를 갖고 있을지 궁금했다.
다시 나의 사회초년병 시절 푹 빠졌던 한국 소설이 있었다. 그의 소설은 매우 우울했고 어두웠다. 그리고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본인은 인간 내면의 외로움과 아픔을 통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당신만 아픈 것이 아니니 본인의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마음을 열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그때 이후로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나의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은 아닐지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은 힘겨울지 모르나 총량의 법칙에 따라 언젠가는 행복이 찾아올 것이란 마음으로 살아가면 어떨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대학 때부터 취업에 대한 고민보다는 사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해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인생’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만 찾아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 도서관에 공부나 과제를 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러 갔었다. 그리고 그때 읽었던 이문열 선생님의 수필집을 우연하게 만났었다. 지금 제목이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한때 항상 내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그 문장. 힘겨울 때마다 되뇌었던 그 문장.
나는 지금 내 자서전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쓰고 있다
이왕이면 행복 총량의 법칙을 추종해 보면 어떨까. 신이 공평하면 내가 정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면. 아니 내가 좀 더 부족해도 말이다. 나의 현재가 불만스럽고 힘겹더라도 이 법칙에 따라 난 조만간 내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시간이 좀 걸려도 용서하겠다는.
오늘도 나는 나를 세뇌시킨다.